2020년 늦가을, 쌀쌀해진 날씨와 함께 초라해진 나뭇가지들이 흔들린다. 길가에는 낙엽이 내려앉았고, 바람이 나뭇가지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적막한 거리는 오히려 깨끗해 보인다. 평소와 같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차들과 한 손에 무언가를 들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로 채워진 분주한 거리. 흘러나오는 거리의 노래와 거리의 소음이 귓바퀴에서 만나 맴돌다 사라져버린다. 해가 시선 너머로 내려앉는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하루가 흘러가는 듯하다.
여기, 창틀 위에 도시의 소음을 지긋이 바라보는 고양이가 있다. 노란 눈을 가진, 검은색과 회색의 털로 이루어진 줄무늬고양이. 지금부터 펼쳐질 모험의 주인공, 톰이다. 특히 등의 반점 무늬가 눈에 띄는 톰은 벵갈 고양이다. 가지런히 정돈된 발톱은 그가 발톱을 기를 필요가 없는 집고양이임을 짐작하게 한다.
저녁노을의 붉은빛은 창문을 타고 톰이 자는 집 안까지 비춰 들어온다. 자고 있던 톰의 눈가에 노을빛이 비쳐오자 그는 살며시 눈을 떴다. 눈앞은 서서히 붉은색으로 뒤덮였다. 톰의 검회색 빛 털에도 붉은 기운이 물든다. 동시에 가을바람의 차가움과 노을의 따듯함이 담긴 공기가 몸을 감싼다. 이에 톰은 창가 틀에 앉아 털을 정리하며 몸을 추스른다. 그 사이 창가를 통해 노을빛이 깊게 드리운다.
톰은 저녁노을이 진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겨울이 오는구나, 벌써 해가 지기 시작하네.
항상 같은 자리에서 노을을 보지만, 오늘의 노을은 유난히 더 타오르는 것 같아.
저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난... 매일 보던 나의 일상과 다른,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어.
저 노을 너머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붉게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는 톰의 눈에도 노을빛이 반사되었다. 무기력하게 흘러간 하루였지만, 붉은 노을은 묘하게 톰의 마음을 상기시켰다. 단잠에서 깨어난 그는 하품을 한 번 하더니 기지개를 켰다. 빛의 변화에 톰의 동공이 커졌다가 조용히 수축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주변은 어지럽혀져 있었다.
그럼 그렇지...
집사는 변하지 않는구만...
옷가지들이 여기저기 늘어진 방과 문 옆의 고양이용 정수기가 눈에 들어왔다. 톰은 가을의 공기를 들이켜 건조해진 목을 축이기 위해 정수기를 향해 나아갔다. 창가에서 출발하여 곳곳에 널린 장애물들을 조심스럽게 피해 정수기에 도착했지만, 톰의 기대와는 달리 안타깝게도 정수기는 비어있었다.
도대체 집사는 왜 방을 치우지 않는 걸까...?
물 한 번 마시기 이렇게 힘들다니...
으.. 목이 갈라질 것 같아.
톰은 정수기를 지긋이 노려보곤 몸을 돌렸다. 그는 타는 듯한 갈증에 언제나와 같이 싱크대 위로 뛰어올랐다. 싱크대에는 설거짓거리들이 널려있었다.
톰은 널브러진 설거지 거리들을 앞발로 툭툭 치며 불평했다.
우웩... 이건 대체 언제 치우는 거야?
톰은 당장이라도 싱크대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에겐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먼저였다.
톰은 유려한 팔을 뻗어 수도꼭지를 살짝 돌리곤 흐르는 물에 목을 축였다. 꿀 같은 물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한 톰은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수도꼭지를 닫고 싱크대에서 내려왔다.
그가 내려와서 주위를 둘러보자 빈 맥주 캔과 잡다한 쓰레기들이 즐비했다. 톰은 지저분하고 칙칙한 방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언제 나아졌냐는 듯 다시 가라앉았다. 톰은 어젯밤 늦게까지 맥주를 마시며 유튜브를 보던 집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책상 위에 올라간 자신을 몇 번 쓰다듬어 주더니 다시 번쩍이는 화면에 집중하던 집사를 생각하며, 톰은 방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오늘 아침 분주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족들은 오늘도 평소와 같이 정신없이 하루를 시작한 듯하다. 곳곳에 널린 옷가지들과 마스크 포장지가 이를 증명한다. 신발장에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신발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어쩔 수 없지...
그 정신에 새 밥을 챙겨줬을 리가 있나..
집사라도 밥을 제대로 먹었어야 할 텐데...
과거와 달라진 가족의 모습에 씁쓸함을 느끼는 톰이었다.
톰은 4명의 한 가족과 함께 아파트에 살고 있다. 부부와 딸 둘로 이루어진 가족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바쁘다. 이 가족의 부부는 맞벌이 부부이며 언제나 바쁜 일상을 보낸다. 가장인 두 딸의 아빠는 항상 새벽같이 출근하고 밤늦게 돌아와 얼굴 보기가 참 힘든 사람이다.
딸들의 엄마는 아빠와 같이 일어나 분주하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아이들을 깨운다. 아이들의 아침을 차리고 엄마도 비로소 자신의 직장으로 부랴부랴 출근한다.
첫째 딸은 대학교 1학년, 둘째 딸은 고등학교 2학년인데, 둘은 아침부터 아주 바쁘다.
톰이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는 가족과 함께 있던 시간이 많았었다. 고양이를 키워본 적 없어 허둥지둥하던 집사의 모습이 어린 톰의 눈에는 조금 이상해 보였지만 그래도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많이 아끼는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톰은 고양이로 태어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너무 지루할 때도 있지만, 톰은 가만히 앉아있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한다. 가족이 잠든 시간에 혼자 창밖을 구경하는 것이 톰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톰은 고독한 고양이지만 여느 고양이가 그렇듯 고독 속에서 낭만을 찾는다.
특히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중 톰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아침이었다.
아침햇살에 눈이 부셔서 일어나면, 집안이 아주 조용했다. 집사들의 방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귀를 기울이면 아주 작은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후에 톰이 가족들을 깨우고, 그들은 톰의 밥을 챙겨주며 함께 아침을 보내곤 했다. 길거리를 전전하던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런 소소한 일상이 톰에겐 행복이었다.
톰이 아침을 먹은 뒤에는 주로 가족들과 함께 자전거 산책을 했다. 모험을 좋아하고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톰에게는 너무나도 행복하고 가족들에게 더욱 애정을 갖게 하는 시간이었다.
톰이 가족들과 함께 처음 자전거 산책을 했을 때는 빠르게 움직이는 자전거 위에 올라타 있는 것이 불안했고, 자신에게 과도한 관심을 두는 이웃들이 낯설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보게 된 바깥의 모습은 정말 흥미로웠기 때문에 톰은 바구니 밖으로 눈만 내놓고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구경하였다.
가족들과 자전거 산책하러 자주 나가게 되면서 톰은 금세 이웃들의 따뜻한 관심에 적응하게 되었다. 또한 자전거의 바구니에 가만히 웅크려 있기보다 몸을 밖으로 쭉 빼고 주변의 풍경을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둘러보는 일이 많아졌다. 자전거 산책을 하면서 톰은 더욱 변화를 즐기고 다양한 이웃들과 교류를 즐기는 고양이로 변화해갔다.
가족들과의 생활은 톰의 식성도 변화시켰다. 이 집에 오기 전까지 참치캔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생각했던 톰에게 야채라는 신세계를 만나게 해준 것이다. 막내 집사는 각종 야채를 싫어했다. 딸이 야채를 먹을 때마다 아빠는 막내에게 초콜릿을 보상으로 주었지만, 딸은 가족들의 눈을 피해 톰에게 몰래 야채를 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막내와 비밀을 공유하게 된 톰은 야채가 의외로 맛있었다. 그렇게 톰은 오이, 완두콩, 당근, 호박 등을 좋아하는 채식 고양이가 되었다.
한동안 모든 것이 완벽했다고 생각했지만, 가족들과의 낭만적이고 평온했던 일상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톰이 아침에 집사를 깨우는 일이 드물어졌고, 심지어는 아침에 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이제는 이른 아침부터 요란하게 울리는 스마트폰 알람 소리가 톰 대신 가족들을 깨운다. 어느 순간부터 가족들은 포근한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톰 대신 스마트폰을 찾았고, 두 자매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밥 먹을 때조차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질 않는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문득 톰은 이 집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된 날을 떠올렸다.
그때 두 딸은 초등학생과 중학생이었다.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된 사연이지만, 톰이 이 집에 오기 전까지 두 자매는 서로 맨날 싸워서 사이가 무척 안 좋았다고 한다. 둘은 고양이를 무척 기르고 싶어 했지만, 부모님이 여러 가지 이유로 크게 반대했었다. 자매는 고양이를 키우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동맹을 맺고 밤낮으로 부모님을 졸라 결국 고양이를 길러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이후 톰이 집에 오게 되자 그들은 마치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무척 기뻐했고, 둘의 사이는 이전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좋아졌다. 매일같이 톰과 놀면서 서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책임감을 갖고 톰을 보살피는 과정에서 우애가 싹텄다. 톰이 비로소 두 자매가 서로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이가 되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게 도운 존재가 되었다. 자신이 두 자매 관계를 발전시킨 것 같아 자매들이 대화하는 것을 볼 때면 톰은 항상 뿌듯함을 느끼고는 하였다.
그런 시절도 있었지...
톰은 두 딸의 과분한 관심이 부담스러웠던 적이 있다. 그들의 장난이 귀찮았던 적도 있다.
그때가 그리워질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지.
톰은 괜스레 씁쓸해졌다.
톰은 모든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 편해지고, 변해가고 익숙해져 가는 관계 속에서 소홀해진다고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톰에게는 이제 혼자 있는 시간이 익숙하다. 어쩌면 이 시간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톰은 자신이 혼자 있는 시간을 더 좋아하게 되었듯이, 집사도 집에 있는 시간보다는 밖에 있는 시간을 더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며칠 전 산책을 생각해볼 때, 그것도 이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산책이 둘째 딸이 중학교 2학년 때였으니까.... 3년 만에 산책을 하러 갔던 날이었다. 이제는 좀 끼는 자전거 바구니에 담긴 톰은 늘 그랬듯이 둘째 딸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의 집사와의 산책과 이웃들과의 만남에 톰은 괜히 설레었다. 그래서 괜히 더욱 몸을 꼿꼿이 펴고 여유로운 척 고개를 살랑였다. 그러나 공원에 도착한 톰은 뭔가 변했음을 느꼈다. 늘 사랑스럽게 톰을 봐주던 이웃들은 스마트폰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전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내가 생각했던 건 이게 아닌데..!!
괜찮아, 내게는 우리 집사가 있으니까
톰, 여기 봐봐. 빨리!
집사의 부름에 사랑스러운 눈으로 응답했던 톰의 마음은 이내 싸늘하게 식고 말았다. 둘째딸도 스마트폰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톰을 부르고 있던 것이다. 그래도 기대를 버리지 않으며 다가갔던 톰은 집사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둘째 딸은 폰으로 사진 찍을 때만 톰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는, 사진을 다 찍자 다시 톰에게서 휙 눈을 돌려버렸다.
톰은 가끔 인간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톰이 처음왔던 그 때에 비해 지금의 가족들은 더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닥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톰은 무엇이 가족들의 진짜 웃음인지 안다.
그 딱딱한 고철 덩어리가 정말 집사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걸까?
분명 우리 가족들은 폰을 볼 때보다 나와 산책할 때 훨씬 행복하게 웃었어....
폰을 놓지 못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불행해보이는 걸,,
집사의 관심을 다시 제게로 돌리기 위해 작게 울어봤지만, 소용없었다. 집사의 시선을 전부 빼앗는 저 작은 화면이 괘씸하게 느껴졌다.
저 작은 화면을 빼앗으면 나를 보고 웃어주지 않을까..?
톰은 얌전히 앉아있던 바구니에서 뛰어올라 집사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집사가 제게만 관심을 주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집사의 반응은 매정했다. 오히려 톰에게 화를 냈다.
톰!! 뭐 하는 거야! 위험해, 얼른 내려가.
톰은 시무룩해진 채 다시 바구니로 뛰어내려 갔다. 그렇게 며칠 전의 산책은 톰의 머릿속에 나쁜 기억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슬펐던 며칠 전 산책을 생각하던 톰의 시선은 집사가 어제 담아놓은 사료가 담긴 밥그릇으로 무심하게 이동했다. 밥을 챙기는 것은 막내 집사의 일이었다. 사료를 먹기 전엔 항상 막내 집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톰은 평소처럼 무의식적으로 밥그릇에 남은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오늘도 똑같은 시간, 똑같은 사료야......
날마다 똑같은 상황만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 같아......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이런 거구나..
어쩌면 지금 고픈 것은 사료가 아닌 사랑이었다. 그리운 과거가 떠오르며 지금과 비교하니 있던 식욕도 사라지는 듯하였다. 이윽고 톰은 몇 입 먹다 발길을 돌렸다.
집사가 보면 잔소리할 게 뻔하지만 몇 시간 동안이나 밖에 있었던 습한 사료는 싫어.
그리곤 이내 앞발로 세수를 몇 번 하더니 창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창에 비친 고양이는 고동색의 줄무늬를 이루는 윤기 있는 털과 작지만 날렵한 콧잔등을 가진 늠름한 고양이였다. 예전의 비루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무언가를 경계하던 고양이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톰은 자신의 모습을 한참 응시하더니 중얼거린다.
이게 지금 내 모습인가.
나도 이젠 많이 변했구나.
예민하게 지낼 필요가 없는 생활은 톰의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영역 싸움을 위해 으르렁대고, 밥을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애교를 부리고, 최대한 따뜻한 곳을 찾기 위해 골목길을 돌아다녔던 고양이는 이제 없다. 가끔 창밖으로 보이는 다른 고양이들의 영역싸움은 그에게 이젠 자극거리도 되지 않았다. 단지 안락한 집안에서, 집사들과 함께 평온한 생활을 보내는 집고양이 한 마리일 뿐이었다.
길에서 지낼 땐 상상도 못 했을 일이지.
골목골목을 누비며 무리를 이끌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때는 어떻게 다녔나 몰라.
그는 아침에 일어나 정수기에서 물을 마시고, 영양가가 풍부한 사료에 투정을 부리고, 창가에 앉아 사람들과 노을을 감상하는 고양이가 되었다. 창가에 비친 톰의 반질반질한 털이 그가 지금 얼마나 편안한 생활을 누리는지 그에게 보여주는 듯했다. 털뿐만 아니라 늘어난 그의 체중도 안락한 삶의 결과물이다. 처음 집에 살기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꽤나 통통해진 모습이다.
그렇다고 집사 가족들이 톰에게 무관심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믿는다. 톰에게 예전만큼 큰 관심과 많은 사랑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톰은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었다. 꼬박꼬박은 아니지만, 밥도 챙겨주고 편안히 쉴 수 있는 안식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관심과 사랑이면 충분하다고 톰은 생각했다.
과하진 않지만, 지금처럼 날 반겨주고 챙겨주는 정도가 딱 좋아.
최근에는 예전보다 관심이 덜한 것 같긴 하지만, 뭐 어때.
가족들이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이던걸. 오늘 돌아오면 꾹꾹이를 해줘 볼까.
톰은 소파 위로 뛰어올라 조용히 털을 가다듬었다.
이 정도면 되겠어. 털 정리도 안 하고 집사를 맞이할 순 없지.
집사가 돌아오는 대로 밥을 달라고 졸라댈 것을 생각하며 거실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해가 질 무렵이었지만 집 안에는 톰 말고는 아무도 없다. 주위는 어둡고 조용했다. 톰은 밥그릇을 뒤적여보기도 하고, 장난감을 이리저리 발로 차보기도 했다. 하지만 고요하고 적막한 집안에는 톰만이 있을 뿐이었다.
톰은 자신이 사는 넓고 적막한 집을 한 바퀴 휙 둘러보며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느긋한데, 오늘도 여전히 집사들은 다들 바쁘구나.. 인간들은 항상 뭐가 그리 바쁜지 원...
가족들은 하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누구 하나 빠질세라 톰에게 바깥 생활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곤 했다. 아빠 집사는 회사에 새로 들어온 후배가 말썽이라느니 이번에 출장이 잡혔다느니 하는 얘기를 했다. 엄마 집사는 요즘 날씨가 추워진다느니, 딸들이 어쨌다느니 하는 얘기를 주로 했다. 첫째 딸은 사귀는 남자친구 얘기를 몰래 털어놓았었고, 둘째 딸 집사는 학원 숙제가 너무 많다고 톰을 붙잡고 투정했다. 한때는 흥미롭게 들으며, 그들의 삶에 공감해 주었다.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푸념이라는 걸 깨달은 뒤에는 그냥 그러려니 하며 흘려듣게 되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며 인간들은 참 복잡하게 사는구나 하고 매번 톰은 생각한다.
그러곤 하품을 한번 해준 뒤 옆에 누워있으면, "넌 편해서 좋겠다"라며 투정과 함께 손길이 다가온다. 다들 투덜거리지만, 여전히 나를 좋아해 주는 듯하다.
톰은 이제 집사들의 일과가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톰은 바깥 생활을 하고 있을 집사들을 떠올렸다. 딸 둘은 모두 학교에 있을 시각이었고, 부부 역시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터였다. 반면에 저녁이 되어 노을로 붉게 물든 집에 덩그러니 남겨진 톰의 일상은 그들과 달리 한가하기 짝이 없다. 물론 이런 생활에 불만이 생긴 적은 거의 없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로 고양이의 평화. 심심하다면, 집사들이 집에 도착한 후 뒹굴거리며 놀자고 보채면 될 일이다. 그렇기에 톰의 일상은 캣타워에 올라가 고요함을 비집고 들려오는 시계 초침 소리를 자장가로 삼아 낮잠을 자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유유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전부이다.
그렇지만 오늘 톰은 뭔가 확실히 달랐다.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항상 그렇지는 않듯이, 집고양이도 밖으로 나가고 싶은 날이 있는 법. 집이라는 안락한 자신의 보금자리 안에서 유유히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고양이었지만, 오늘따라 반짝이는 노을과 따스한 햇살이 마치 자신을 집 밖으로 부르는 것 같았다. 또한, 요즘 바쁜 집사들 때문에 집 밖에 통 나가지를 못하는 중이었기에 그날은 유난히도 바깥 구경이 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던 찰나였다.
저녁에 본 노을 때문이었을까? 평소 혼자 몰래 외출을 할 때는 집사가 도착하기 전까지 집에 돌아오던 그였지만, 그날은 왠지 느낌이 달랐다. 매일 보던 익숙한 노을이었지만 오늘은 새로운 기분을 맛보고 싶었다. 쏟아지는 햇살을 내리쬐며 길거리를 배회했던 과거가 그립기도 했다. 창틀을 비집고 들어와 걸쳐있는 노을이 아닌, 그 무엇도 방해하지 않는 그 온전한 도화지 위의 물감을 보고 싶었다.
집사들에게는 걱정을 끼쳐 조금은 미안하지만, 오늘만큼은 작은 일탈을 해야겠다.
톰과 그의 가족의 집은 1층이었는데, 오늘은 아주 운이 좋게도 집사가 창문을 방충망이 없는 쪽으로 열어두고 나간 듯했다. 톰은 오늘이야말로 일탈하기 딱 좋은 날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콧노래를 부르며 망설임 없이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열려있는 창문에 가까워질 때마다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와는 반대로 톰의 심장은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평소의 외출과는 다른 느낌. 오늘따라 유독 붉은 저 노을처럼 강렬한 어떤 일이, 창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걸음걸이마다 생각이 바뀐다. 두려움과 떨림이 서로 엎치락 뒤치락 달리기를 하여 톰은 머리가 아파왔다. 오랜만에 과거의 공간으로 깊이 들어가본다는 생각을 하니 자신의 걸음이 조금 느려지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저 창 너머의 공간도 내가 딛고 살아왔던 공간이었어.
그런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간 톰의 발걸음이 다시 가벼워졌다.
그리고 언제나 그래 왔다는 듯이 어렵지 않게 베란다 창문을 폴짝 뛰어넘었다. 길에서 생활했던 시절이 있는 톰이었지만 집 마룻바닥만 밟던 발바닥이 콘크리트 위에 오르자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말끔한 마룻바닥과는 달리 거칠고 차갑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이런 바닥을 다시 밟는 건 엄청 오랜만인걸. 옛날 생각나는데?
음.. 내가 자주 갔던 곳이 어디더라
...저쪽으로 가볼까?
하지만 톰은 이내 적응했다는 듯이 자신이 자주 다녔던 길들을 떠올리며 발을 내디뎠다. 매번 혼자 지나온 익숙한 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일탈이라는 새로운 모험을 떠난다는 생각에 모든 풍경이 새로워 보였다. 가을로 접어들어 갈색빛이 도는 수풀, 밟으면 바스락거리는 낙엽, 시원한 공기. 게다가 잘나갈 때의 청춘으로 돌아온 듯한 분위기까지. 톰은 그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간혹 인간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톰을 더욱 들뜨게 할 뿐이었다.
톰은 한참 동안 따뜻한 햇살을 느끼며 가을 풍경을 감상하였다. 자연이 그려낸 가을 풍경은 그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항상 창틀 위에서 바라보던 도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자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단풍으로 붉게 물든 공원은 화려한 수채화 같았다. 수채화 같은 노을이 보고 싶어 시작한 일탈이지만, 뜻밖에 아름다운 자연의 가을 수채화를 보게 되어 톰은 더욱 두근거렸다.
아무도 없네? 이렇게 조용한 것도 약간 낯설긴 하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엔 흔한 길고양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톰은 두리번거리다 자신의 후각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를 맡았다. 이내 톰의 눈에 들어온 것은 뚜껑이 반쯤 열린 참치캔이었다. 주변을 살피고 냄새를 맡아보니 다행히도 쥐약이 들어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어? 누가 놓은 거지?
채소랑 사료만 먹다가 오랜만에 참치캔을 보니 먹고 싶네!
집에 있던 사료도 거의 안 먹어서 마침 배고픈데 잘됐다.
톰은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로 밖으로 나온 터라 몹시 허기진 상태였다. 배가 고픈 톰은 참치캔에 든 참치를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음~ 맛있다~ 역시 참치캔은 최고라니까!
그때, 옆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무엇인가가 저 수풀에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곳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검은 고양이가 수풀에서 튀어나와 참치캔 쪽으로 달려온다. 아마 톰처럼 길가에 놓인 참치캔 냄새를 맡고 왔지만, 한발 늦어서 지켜보고 있던 것이 틀림없다.
한때 길에서 생활하던 시절, 종종 다른 길고양이와 사냥한 먹이를 나눠 먹기도 했던 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제대로 먹지 못한 톰은 배가 너무 고팠다.
오늘은 그렇게 호락호락 양보해 줄 수 없어.
톰은 입안의 참치를 얼른 삼켜버린 후 꼬리를 내리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오랜만의 일탈에서 발견한 금덩어리 같은 참치캔인데 다른 고양이에게 뺏길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참치캔은 톰의 건강을 생각하는 집사에게서 쉽게 얻어먹을 수 없는 일종의 불량식품 같은 것이었다. 딱 오늘 같은 날에 어울리는 먹을거리가 아닌가.
검은 고양이도 참치캔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는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그르렁거렸다. 검은 고양이의 기세에 살짝 움찔하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톰 또한 다시 그를 노려보았다. 둘은 한참 동안이나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어라? 이 녀석 봐라. 하지만 눈앞에 있는 참치캔을 뺏길 수는 없지.
길고양이 시절의 톰은 다른 고양이와의 협력만 배운 것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때로는 다른 고양이를 적대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 싸우는 방법도 배웠다.
이는 본인을 지키기 위한 보호 수단이면서도 생존을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그 시절의 경험과 기억은 집고양이 생활에 익숙해진 톰에게도 아직 남아 있었다. 톰은 오랜만에 그 서늘한 감각을 떠올리며 어떤 수를 택할지 생각했다.
그래... 기선제압만 해도 반은 먹고 들어갔었지...
톰은 으르렁거리며 상대를 바라보다가 검은 고양이를 향해 돌진했다. 이 방법이 통했는지 검은 고양이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친 후 한껏 자세를 낮춰 톰을 경계하는 듯했다.
어린 녀석인 것 같은데 제법인걸?
방금 한 번의 공격으로 확실하게 감을 잡았다. 톰은 다시 몸을 부풀리며 그를 향한 돌진을 준비했다.
하나, 둘, 셋!
톰은 아까보다 좀 더 빠른 속도로 달려가 솜방망이 펀치를 날렸다. 길에서 생활했던 예전처럼 발톱이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검은 고양이는 어려서인지 매우 당황스러워 보였다. 근방에선 먹이를 두고 싸울 고양이가 많이 없어, 검은 고양이에게는 자주 겪어보지 못했던 상황인것이 분명했다.
검은 고양이는 피하지 못하고 결국 톰의 일격을 제대로 맞아버렸다. 꽤나 아팠는지 검은 고양이는 서글픈 울음소리를 내며 도망쳐버렸다.
검은 고양이가 도망친 방향을 바라보며 몇 번 승리의 포효를 하던 톰은 평온함을 되찾고 참치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원래도 맛있는 참치캔이었지만 승리감과 함께하는 식사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톰은 윤기가 나도록 참치캔을 깨끗하게 비웠다. 안락하게 생활한 지 오래됐지만 태생은 어쩔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어딘가 눌러 담아두었던 야생의 본능이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훗, 나를 상대하려면 더 크고 와야 할걸!
그 옛날 거리를 주름잡던 나라고~
톰은 검은 고양이를 물러내고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야생의 본능에 자신도 분명 고양이였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한껏 들뜬 톰은 이런 기분이면 오늘은 뭐든지 잘 풀릴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한편, 참치캔 쟁탈에 실패한 검은 고양이는 눈물을 머금은 채 길 건너에 있는 허름한 동네 미용실로 향했다.
무슨 일이야, 포키? 내가 준 참치는 다 먹었어?
미용실 구석, 작은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앳된 얼굴의 소녀가 냘프게 울먹이는 검은 고양이를 달래며 속삭였다.
손님들 계실 때는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엄마가 알면 날 또 혼내실 게 분명해.
아기 고양이는 길모퉁이에서 참치를 먹어 치우고 있는 톰을 애처롭게 쳐다볼 뿐이었다. 소녀는 오늘따라 기운이 없는 고양이가 의아하다고 생각하며, 고양이가 쳐다보는 곳을 향해 눈을 돌렸다.
어머, 못 보던 고양이네?
톰을 발견한 소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소녀는 참치 캔을 주면서 포키와 친해졌던 기억이 떠올랐고, 톰과도 친해지기 위해서 참치 캔을 들고 왔다.
자 여기! 맛있게 먹어!
참치 캔을 본 톰은 또다시 맛있는 참치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미용실로 다가온다. 이를 본 소녀의 엄마는 소녀에게 잔소리를 한다.
내가 미용실에 고양이 들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 어우 진짜 말은 누구처럼 정말 안 들어! 얼른 데리고 나가!!
소녀는 어쩔 수 없이 일단은 톰에게 참치 캔만 주고 돌려보내야 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참치 캔만 주지만, 다음에 오면 더 맛있는 간식 줄 테니 자주 놀러 와서 나랑 놀자~!
톰은 마냥 좋아서 소녀가 준 참치를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이미 참치캔 한 통을 다 먹은 뒤라 배가 불러 참치를 남기게 되었다.
야옹~ 꼬마 집사가 뭘 좀 아네. 친해지고 싶으면 참치캔이지!
하지만 난 이제 배불러 그만 먹어야지.
소녀는 톰이 참치캔을 먹다 말자 의아해하며 톰과 검은 고양이를 봤다. 소녀는 그제야 자신의 옆에 기운 없이 누워있는 고양이가 방금 슬프게 울었던 이유를 깨닫고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참치캔을 모르는 고양이에게 뺏겨 억울한 마음에 그녀에게 와서 호소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소녀는 포키의 기분보단 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고양이의 등장에 즐겁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길바닥에 놓여있던 참치캔은 소녀가 검은 고양이를 위해 준비해둔 것이었다. 하지만 톰이 이를 알리 없지 않은가. 당장 눈앞에 놓여있는, 심지어 열려있는 참치캔은 어떤 고양이라도 욕심냈을 것이다. 소녀는 톰을 향해 걸어나왔다. 검정 고양이를 위해 마련했던 참치캔을 뺏어먹은 톰이 밉기는 커녕 새로운 고양이라는 반가움에 달려갔다.
안녕! 참치캔 맛있게 먹었니?? 다음부턴 2개로 나눠두어야겠구나! 대신에 포키랑 나눠먹는 거야!
검은 고양이의 이름은 포키였군,
톰은 길에서 사는 놈 치고 팔자가 좋은 편이라 생각했다. 이어 톰에게 한 걸음에 달려온 소녀가 낯설고 당황스러웠지만 둘째 딸 집사와 비슷한 또래처럼 보여서 소녀의 손길에 도망치지 않았다.
이 소녀가 참치캔을 챙겨줬던 모양이군..
아까 보니까 요즘 고양이들이 애교도 많이 부리던데 고맙다고 인사는 해야겠지?
소녀에게 부비적 애교도 부려보고 나를 쓰다듬기 위해 앉아있는 소녀를 한 바퀴 돌며 고맙다는 인사를 표했다. 소녀의 옆엔 아까 싸웠던 검정고양이가 있었다. 내색은 안했지만 톰은 다 먹어버린 참치캔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톰은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 내 이름은 톰이야 참치캔은 잘 먹었어. 다음엔 같이 나눠먹자. 배고팠는데 양보해줘서 고마워.
검정 고양이는 말을 먼저 걸어주는 톰이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톰이구나! 제 이름은 포키에요! 앞으로 자주 만나요!
그래 포키. 나는 집고양이라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지만, 다음에 만나자구.
소녀와 검정고양이가 다시 미용실로 건너가고 톰은 혼자 남겨졌다. 배도 부르고 새로운 고양이 친구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 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어디로 가볼까나~
톰은 곰곰이 갈 곳을 생각해보았다. 역시나 톰에게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만의 장소가 있었다.
맞아 내 아지트, 공터로 가야겠다!!
길고양이 시절, 톰은 친한 친구나 여자 친구와 싸우고 나면, 항상 공터에 방문하곤 했다. 공터에는 아무도 없어, 항상 적막함이 유지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울거나 소리치며 그날 마음의 응어리를 털어내곤 했다. 또한, 가만히 탁 트여있는 하늘을 보고 있으면 답답함이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곳은 그가 가장 마음 편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오랜만이네...
듬성듬성 풀이 자란 작은 공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적막했다. 공터 앞으로는 버려진 일 층짜리 건물 몇 채가 줄지어 있었고, 뒤로는 키 큰 풀이 무성한 벌판이 멀리까지 뻗어있었다. 톰이 몇 달 전부터 아지트로 삼은 이곳은 더없이 좋은 놀이터였다. 건물들 사이의 좁은 골목에 쌓인 온갖 잡동사니들이 건물 앞쪽 길에서 공터가 보이지 않게 숨겨주었고, 공터를 둘러싼 벌판의 키 큰 풀들도 마찬가지였다. 톰은 공터에서 지내면서 단 한 번도 너구리와 같은 위험한 동물을 마주치지 않았다. 풀들 사이로 너구리나 족제비 같은 위험한 상대가 튀어나올 법도 한데, 가끔 등장하는 것은 갖고 놀기 좋은 작은 뱀들뿐이었다.
혹시라도 갑자기 족제비가 튀어나오진 않겠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것은, 문득 얼마전 거실에 틀어진 TV에서 족제비가 자주 출몰한다는 뉴스를 스쳐봤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노을의 끝자락이 물든 공터는 붉게 타올라 톰에게 본능적인 위험을 직감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쓸데없는 걱정임을 톰은 깨달았다. 과거의 자신이 어땠던가. 방심하지 않고 적당히 주의를 기울이면 될 일 이었다.
아늑한 집에만 있더니 어지간히 걱정도 많이 늘었군. 하지만 적당한 걱정은 나쁠 건 없지.
톰은 아까보다 신경을 곤두세운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톰은 익숙한 몸짓으로 공터 앞 골목의 잡동사니들을 밟고 올라가, 건물의 파란색 판넬 지붕 위로 점프했다.
며칠 전에 봤던 노을처럼 붉게 물들고 있는 하늘을 이번엔 집이 아닌 밖에서 보며 톰은 생각했다.
지루하네
좋은 생각이 나 것 같았다. 그러자 톰은 공터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톰이 말했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으니 공터에만 있지 말고 저쪽으로 한번 걸어가 볼까?
지붕 위에서 콘크리트로 된 길 양쪽을 멀리까지 재차 확인한 후에는 밑으로 뛰어내려, 해가 지는 방향으로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톰은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길 끝을 보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길을 걷다 바람을 타고 오는 다른 길고양이들의 영역 표시 흔적에 톰은 괜히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고양이들과 시비가 붙어 몸에 상처라도 난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아까 검은 고양이에게 참치캔을 빼앗기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의기양양해지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온몸을 낮춰 경계하는 것도 잠시 그는 길고양이가 주변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느린 발걸음으로 공터를 서성이며 생각에 잠겼다. 노을빛에 물든 공터는 사색하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때때로 다른 길고양이들의 흔적을 느낄 때면 톰은 과거를 떠올리기도 한다. 과거 주인이 없던 떠돌이 시절을 말이다. 온전히 자기만의 자유를 찾아 돌아다닐 수 있었던 시절, 어쩌면 톰은 무의식적으로 그때의 시절을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톰은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들어 굶주린 날이 많기는 했지만 길고양이 친구들과 힘들게 사냥해 온 먹잇감을 나누어 먹었을 때를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한때 골목을 주름잡던 톰은 먹잇감을 쉽게 구할 수 없을지라도 날렵함과 잔머리로 고양이 무리에서 가장 먹잇감을 많이 찾으며 큰 공을 세웠다. 그렇게 톰의 세력은 점차 확장되었고, 당시 고양이들 사이에서는 대장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톰은 길고양이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다 이내 발걸음을 멈췄다.
아... 그때 많이 힘들긴 했지만 자유롭고 행복했어.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떨까?
이러한 생각과 함께 그 당시 고양이들이 그리워진 톰. 오늘따라 그들이 그립다. 하지만 톰은 다른 고양이들과의 마지막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톰의 마지막 도둑질 당시, 다른 고양이들과 함께 생선 가게의 어항 속 생선을 훔치려다 톰은 그만 어항에 빠져버렸고 그 소리를 들었던 주인은 재빨리 톰을 잡았다. 잡힌 톰은 다른 고양이들이 도망가는 뒷모습을 보며 죄책감이 들어왔다. 설마 자기가 실패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톰은 그들의 뒷모습에서 자신에 대한 실망감을 느꼈었다. 그렇게 톰은 고양이 보호소로 끌려갔고, 지금의 주인에게 입양되기에 이른다.
밖에 나와 괜히 여러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 또 감회가 새롭다. 집사들과의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면서 가끔씩 바깥세상을 동경한 그는 오늘 안락함 대신 자유를 택했다. 그리고 집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톰은 오늘 살아온 나날 중 손에 꼽을 만한 꽤나 신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찍찍
그때, 귓가에 들리는 소리에 동공을 좁혔다. 잠시 동안 신경을 곤두세운다.
주변을 둘러보니 저 멀리 꼬리 하나가 보였다. 털이 거의 없는 갈색빛의 꼬리였다. 톰은 계속 살랑살랑 움직이는 꼬리에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치 본능이라도 깨어난 것처럼 쥐에게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앗! 쥐인가?
예전에 내 쥐 잡기 실력은 정말 훌륭했었는데.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볼까?
그렇게 톰은 꼬리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때 꼬리가 움직였고 톰은 몰래 뒤를 따라갔다. 오랜만의 쥐 사냥에 톰은 잔뜩 들떠있었다. 톰은 온갖 신경을 소리와 눈앞의 꼬리에 집중했다. 지금 톰의 머릿속에는 저 쥐를 사냥해 집사에게 가져다줄 것이라는 다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랜만에 하는 사냥이었지만 자신의 실력이 아직 건재함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톰은 엉덩이를 치켜들고 쥐를 향해 달려들 준비를 했다.
하나, 둘, 셋!
톰은 속으로 숫자를 센 뒤 방심한 채 서 있는 쥐의 뒤를 공격했다! 움직이던 꼬리의 뒤를 쫓다 꼬리가 멈추었을 때, 톰은 잽싸게 쥐의 꼬리를 밟았다. 그리고 쥐를 덮친 그 순간, 톰은 화들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뜬 채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쥐가 아니라 거대한 개인 것이 아닌가. 개는 하얗고 뻣뻣한 털에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톰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하룻고양이 개 무서운 줄 모르고 덮친 것이었다. 개는 공터 주변에 있는 주인의 가게를 지키면서 살았다. 하루 종일 가게를 지키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개 역시 공터가 자신에게 가장 편한 공간 중 하나이어서 일이 끝나고 공터에 와서 쉬었다. 오늘도 가게를 하루 종일 지키다가 공터에 와서 쉬고 있는데 톰이 실수를 해버린 것이다. 개는 자신의 꿀 같은 휴식을 방해한 톰에게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오래 사냥을 쉬었던 탓일까, 예상치 못한 상황에 톰의 몸은 일순간 굳고 말았다. 개의 덩치는 톰의 세 배 가까이 되어서 눈을 마주치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다. 옛날의 패기라면 한 번 덤벼볼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닌 듯 했다.
개의 얼굴에는 누가 보아도 이 구역의 대장이라는 것을 알기 쉬울 정도의 큰 상처가 있었다. 부릅뜬 두 눈에는 시선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카리스마가 담겨 있었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든 톰은 눈을 내리깐 채 간신히 개의 목에 걸린 목걸이만을 볼 수 있었다. 목걸이에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슬링키♡'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름이 슬링키...? 주인의 작명 센스가 영...
개 주인의 작명 센스에 대해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톰은 이제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게 되었다. 하룻고양이 개 무서운 줄 모르고 덮친 것이었다.
이대로면 나 잡아먹힐지도 몰라!
개는 공터 주변에 있는 주인의 가게를 지키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 하루 종일 가게를 지키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휴식을 가진 것일거다. 개에게도 공터는 자신에게 가장 편한 공간 중 하나라 일이 끝나고 공터에 와서 쉬었던게 분명하다. 그렇게 오늘도 가게를 하루 종일 지키다가 공터에 와서 쉬고 있는데 톰이 실수를 해버린 것이다. 개는 자신의 꿀 같은 휴식을 방해한 톰에게 굉장히 화가 나 있던것 처럼 보였다.
오래 사냥을 쉬었던 탓일까, 예상치 못한 상황에 톰의 몸은 일순간 굳고 말았다. 개의 덩치는 톰의 세 배 가까이 되어서 눈을 마주치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다. 옛날의 패기라면 한 번 덤벼볼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닌 듯했다.
톰은 주춤하였다.
아오 망했네..
지금...바로...튀어!
마음속으로 외치며 전력질주로 달렸다. 그리고 슬링키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감히 이 슬링키의 꼬리를 밟는 것도 모자라, 공격까지?!!!
용서하지 않겠다!!!
당황한 톰은 주춤거리다가 개가 달려오자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톰과 개의 숨 막히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톰은 날 선 목소리와 함께 자신을 쫓아오는 개를 보고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다.
거대한 덩치만큼 큰 성량을 가진 슬링키의 짖음은 톰에게 털 하나하나가 곤두설 만큼 공포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내 공포는 톰이 가진 고양이의 본능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톰은 어느새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추며 최대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분명 집안에서 마냥 신나서 우다다다 달렸던 속도와는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톰은 슬링키의 속도 또한 만만치 않음을 느꼈고 위기 상황임을 인지다.
도로 건너편으로 달려가려던 순간 오토바이가 톰의 눈 앞으로 지나갔다.
으아악! 부딪힐 뻔 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참에 톰은 뒤에 쫒아오고있을 슬링키를 떠올리고 뒤를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더 바라보다간 바로 잡힐 것 같은 거리였다.
이대로는 안돼!
고양이들만의 유연성을 이용해 톰은 오른쪽으로 몸을 꺾고 내달렸다. 덩치가 큰 슬링키는 날렵한 톰의 민첩성을 이기지 못하고 내달리던 방향을 향해 미끄러졌다.
이 고양이 자식!
잡고 말거야!!!
잡힐뻔 했던 위기를 벗어나며 톰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자유가 마냥 편하지만은 않구나!
톰은 집안에서 편안한 게 있는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지만, 뒤에 달려오는 개의 소리가 그러한 생각을 깨뜨렸다.
그러자 톰은 지금 자신의 상황을 다시금 상기하였고 도망치는 것만 생각하였다.
잡히면 안 돼! 죽을지도 몰라!
개는 침을 질질 흘리며 톰을 향해 달려가며 계속해서 짖었다.
톰은 소리에 압도되어 뒤를 돌아볼 수조차 없었다. 만약 여기서 잡히기라도 한다면 그다음 상황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이 상황에서 구해주길 기도했다.
제발...!
하지만 인적이 드문 이 동네에서 개가 짖는 소리를 이상하게 생각할 인간은 없다.
톰이 개를 따돌리기 위해 높은 담벼락을 타고 지붕 위로 뛰어오르자 동네 지리를 꿰뚫고 있던 개는 지름길을 통해 톰을 바짝 추격하기 시작했다. 톰은 전력을 다해 질주했지만, 개의 속도를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바로 등 뒤에서 짖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 개의 침방울이 톰의 꼬리에 닿는 것이 느껴질 만큼, 둘의 거리는 좁혀지고 있었다. 개에게 거의 다 따라 잡힐 위기에 처한 톰은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며 소리 질렀다.
고양이 살려!!!
'쾅!'
그 때 누군가가 쓰레기통을 넘어트렸다. 길가에는 쓰레기가 나뒹굴었고, 톰은 고양이 특유의 민첩함으로 널브러진 쓰레기들을 요리조리 피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개는 고양이와 달랐다. 개는 발에 걸리는 쓰레기 때문에 분노에 찬 발걸음으로 주춤거렸다.
우웩!! 이 냄새는 뭐야 대체!! 우욱.. 발에 묻었잖아!!
거기 고양이!! 운 좋은 줄 알아!!
멀어진 개가 톰에게 씩씩대며 소리치고는 발길을 돌렸다. 잠시 후 개는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톰의 다리는 여전히 후들거리고 있었다. 잠시 동안 개와의 거리는 벌어졌지만, 톰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버티며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자신을 도와준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해서도 말이다.
누구야? 누가 나를 도와준 거지?
톰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한 마리의 쥐였다.
아니.. 뭐야..?!!!
제리?!
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와봤더니 너였구나!
이게 얼마 만이야!
그동안 어디로 사라졌던 거냐고!!
그나저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조심해!
일단 여기 풀숲에 잠깐 숨자!!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를 구해준 정체는 뜻밖에도 그의 오랜 친구 제리였다. 제리는 톰의 옛집에서 함께 살던 쥐였는데, 톰의 집사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제리가 오늘 기적처럼 나타나 톰을 도와준 것이다.
제리는 쓰레기통에서 내려와 톰에게 말을 걸었다. 예상치 못한 재회에 톰은 벙찐 얼굴로 쓰레기통에서 내려오는 제리를 쳐다보았다.
톰,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이내 톰도 제리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오! 제리, 너 정말 변한 게 없구나! 도와줘서 고마워
톰과 제리는 서로 마주 보며 한참을 웃었다. 극적인 상황에서 마주한 옛 친구는 이보다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마치 화끈한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톰, 우리 예전에 있었던 일들 아직 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지,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잊을 수 있겠나?
톰은 제리와 함께한 추억을 회상하였다.
톰에게 제리의 과거 첫인상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가 막 현재의 집사 가족에게 입양되어 모든 것이 낯설고 불안했을 때 자신보다 훨씬 작은 몸집의 생쥐가 눈앞에서 자기를 조롱하듯 약 올리는 모습은 톰을 머리끝까지 화나게 만들었다. 항상 복수심에 불타올랐던 톰이었지만, 끝내 제리의 속임수에 당해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고 마는 게 그들의 일상이었다.
톰은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고 약 올리던 제리를 싫어했지만, 가족들이 집에서 나가고, 제리와 투닥거리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제리에게 미운 정이 들기 시작했다. 톰이 제리를 잡기 위해, 제리가 톰에게 잡히지 않기 위한 달리기는 어느새 그들만의 '놀이'로 정착했다. 가족들이 집을 나가는 동시에 그들만의 레이스는 매일 시작이 되었다.
톰 우리 나갔다 올테니까 집 잘 지키고 있어!
이 멍청한 고양이, 쥐 하나 못 잡는 고양이가 집을 어떻게 지킨다고~
너 거기 딱 기다려.. 오늘의 나는 어제와 다르다고!!
톰과 제리는 이렇게 서로 투닥거리더라도 어느새 가족들이 없는 쓸쓸한 집에서 같이 지내는 끈끈한 친구가 되어있었다.
정말 만화 톰과 제리 같다!
그들의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고 막내 집사가 말했다. 마침 갓 입양된 고양이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 고민했던 집사 가족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톰이라는 이름을 주었고 골칫거리였던 쥐도 제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름의 유래와 같이 톰과 제리는 굉장한 앙숙 관계였다. 하지만 그렇게 이어진 앙숙 관계는 세월이 지나 애증 관계가 되었다. 미운 정도 결국 정이 아닌가? 지금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시점. 과거의 기억들이 미화되어 그들 사이에는 아련하면서도 알 수 없는 분위기가 흘렀다. 항상 쫓고 쫓기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친구를 오랜만에 마주하니 미움보단 반가움이 앞섰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들은 본능적인 위험을 감지했다. 아찔한 감각에 뒤를 돌아보니, 아까 제리의 도움으로 따돌린 개가 보였다. 쓰레기통 때문에 주춤거렸던 개가 결국 톰을 쫓아온 것이다. 감동적인 상봉이었지만, 톰과 제리는 재회의 기쁨을 나눌 시간이 없었다.
그들의 뒤에는 사나운 개가 이빨을 드러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내가 도망간 줄로만 알고 느긋하게 있다니. 간도 큰 녀석들이구나!
개는 자신보다 한참 덩치가 작은 톰과 제리에게 한 방 당했다는 사실을 곱씹어 보니 화가 치솟아 다시 되돌아온 듯했다.
그리고 그는 아까보다 더욱 화가 난 것이 틀림없었다.
왈! 네놈들 감히 내 발에 쓰레기가 묻게 하다니!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제리는 슬링키에게 도발하였다.
응? 너 똥개 아니었니? 너 같은 똥개는 발에 쓰레기가 묻어도 상관없지 않니? 이 똥개야!
개는 으르렁거리며 바로 반박하였다.
똥개라니! 나는 슬링키야! 근본 없는 똥개랑 다르다고!
도발을 좋아하는 제리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톰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에 질세라 곧바로 톰도 개에게 한마디 하였다.
그래, 똥개야 우리 한번 잡아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개는 제리와 톰을 발견하고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또다시 추격전이 시작되었지만 톰은 아까처럼 무섭지 않았다.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최고의 콤비인 제리가 있었고 제리는 톰에게 한 번도 잡히지 않았던 만큼 요리조리 피하는 것에는 재능이 있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둘은 슬링키를 피해 전속력으로 발을 달렸다. 좁은 골목길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코너를 돌아가며 열심히 발을 굴렸다. 하지만 이 좁은 골목길에는 막다른 곳이 있을 것이었고, 계속해서 도망만 치다가는 언젠가는 체력이 떨어져 개에게 잡힐 것이 뻔했다. 둘은 이 상황을 피하기 위한 다른 방안이 필요했다.
제리? 우리 이대로 가다가는 잡힐거야. 다른 대안이 필요해......!
제리는 톰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리는 앞의 갈림길에서 잽싸게 몸을 틀어 샛길로 빠졌다. 그런 제리와 앞으로 내달리는 톰을 보며 슬링키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톰을 쫓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최고의 콤비인 제리가 있었고 제리는 톰에게 한 번도 잡히지 않은 도망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제리는 몸집이 작았기에 얼른 톰 위로 올라탔다. 톰은 방금 전의 추격전으로 지쳐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투정할 때가 아니었다. 둘은 좁은 골목사이로 들어가 쓰레기통을 타고 건물 외벽에 있는 큰 통풍구 위로 올라갔다.
톰, 저 코너에서 아래로! 내가 저 녀석을 뿌리칠 방법을 알아!
톰은 정신없이 내달리며 머리 위에서 들리는 제리의 목소리를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제리가 말한대로 코너를 돌자, 보이는 것은 높은 벽으로 막힌 골목 끝이었다. 톰은 망연자실하여 제리에게 외쳤다.
여긴 막다른 길이잖아!!
제리는 그런 톰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재빨리 내려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곧이어 전에 봐두었던 탈출구를 찾은 제리는 톰에게 소리쳤다.
이것들이.....내가 바보도 아니고
톰은 최대한 발을 굴렸다. 제리에게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만들어줘야했다.
한편 제리는 톰이 시간을 끄는 사이 잽싼 발을 이용해 골목 구석구석을 스캔하고 있었다. 슬링키로 부터 도망갈 방안을 찾는 중이었다. 그때 골목 구석에 있는 작은 구멍이 보였다. 제리의 머리위에 전구가 반짝였다.
그래 이거야!
제리는 그대로 몸을 틀어 톰이 도망가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세골목을 지나 코너를 도니 콤과 그를 쫓는 슬링키가 달려오고 있었다. 제리는 톰에게 소리쳤다.
나에게 저 미친개를 따돌릴 방법이 있으니까 나만 따라와!!
내가 하나 둘 셋 하면 왼쪽으로 도는거야 알겠지!??
제리는 이 말과 함께 오른쪽 눈으로 윙크를 보냈다. 제리와 우여곡절을 함께한 톰이기에, 톰은 바로 그 뜻을 알아차렸다.
알겠어 제리!!
톰이 자신의 말을 이해했기를 바라며 제리는 외쳤다.
하나, 둘, 셋! 지금이야!
슬링키는 이런 말을 다 들리게 외치는 둘이 참 멍청하다고 생각하며 숫자에 맞춰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
아뿔싸, 톰과 제리는 오른쪽 골목으로 곧장 달려가는 것이었다.
슬링키는 그 둘을 바라보다가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벽에 코를 세게 박았다.
한편 둘은 제리가 봐둔 탈출 루트로 재빠르게 도망치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 여기라면 저 녀석이 오지 못할 거야!
제리는 작은 구멍으로 톰을 안내했다. 몸집이 비교적 작은 쥐와 고양이 정도만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는 그런 작은 구멍이었다.
톰은 자신의 눈앞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제리의 연갈색에 검은색 줄무늬 몸통만을 따라 전속력으로 구멍을 향해 달려갔다.
내가 또 놓칠 것 같으냐! 너 잡히기만 해라! 우리 무리 애들이 보는 앞에서 혼쭐을 내주겠어!!
슬링키의 분노에 찬 외침이 뒤에서 들려왔다. 생각보다 가깝게 들리는 개의 목소리에 순간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톰은 유연한 몸동작으로 작은 구멍으로 순식간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톰은 간발의 차로 개에게 잡히지 않고 구멍을 통과했고 화가 난 개는 구멍 앞에서 한참 씩씩거리다 돌아갔다. 톰과 제리는 고개를 돌려 서로를 마주보고는 피식 웃음이 터졌다. 오랜 옛날 함께 지내며 느꼈던 감정이 다시금 톰과 제리의 마음 속에서 피어오른 것이다.
휴~ 다행이야.
제리!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반가운 목소리로 톰이 묻자 제리는 대답했다.
예전 지역은 먹을 게 너무 없어서 이삿짐 차를 몰래 타고 여기까지 오게 됐어...
지금은 전보다는 상황이 나아지긴 했지만 별반 다르지 않네... 오히려 혼자가 된 이 삶이 더 불행하게 느껴질 때도 많아.
제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살았던 곳은 그나마 사람이 떨어뜨린 음식으로 식량을 보충하며 생활할 수 있던 곳이었다. 제리는 자신이 살던 지역에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정신을 차리자 그곳엔 이제 제리 혼자뿐, 사람도, 친한 동물들도 이젠 사라져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지나가던 이삿짐 차가 아니었다면, 제리는 그곳에서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다면 톰도 다시 못 만났을 것이다.
톰은 이내 슬픔에 빠졌다. 그곳에서 함께 생활하던 친구들은 이제 없다. 톰은 친구들과의 추억을 회상한다. 톰의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처럼 보인다. 제리는 이런 톰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화제를 돌린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보니까 참 반갑다!!
톰과 제리는 추억에 젖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본 만큼 그동안의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와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꺄하하 맞아 맞아 그때 내가 잘못한 거였는데!
내가 그 때만 생각하면 어! 화가 부글부글 끓는다 알어?
과거의 앙숙이었던 시절 지지고 볶던 추억을 상기하면서 웃기도 하였다. 몇 년 만에 만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당장 어제 만났던 친구인 마냥 둘 사이에서는 어색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예전에 살던 그 집 기억나?
물론이지.
나 잡으려고 쫓아오다가 벽에 부딪힌 네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아직도 훤해.
하루가 멀다고 싸우긴 했어도, 그때가 참 즐거웠는데 말이야.
그때 기억나? 우리가 처음으로 친해진 그 일.
아, 그 외국 고양이 패거리들 이야기 하는 거지? 당연히 기억나지. 그때 일은 아직도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지금쯤 여기에 있지도 않았겠지. 그 이후로 놈들이 그쪽 구역에서 싹 사라져서 다행이야.
참, 어느새 우리가 이렇게 까지 되다니. 정말 격세지감이네.
오랜만에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해는 더욱 저물고, 점점 밤이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톰도 제리도 다시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제리, 나는 이만 가봐야겠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아.
오늘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반가웠고 다음에 또 만나.
그래, 나도 정말 즐거웠어. 조심해서 가.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톰과 제리는 작별 인사를 했다. 그렇게 톰은 제리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집으로 길을 향한다. 그런데 문득 톰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제리를 만나니 기분은 참 좋은데, 살던 지역에 먹을 게 너무 없다고?
집에서 제리가 먹을만한 것들을 좀 가져다줄 걸 그랬나?
아니면, 그냥 우리 집에 같이 가자고 할 걸 그랬나?
집은 조심히 갈 수 있겠지?
톰은 제리의 말이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
예전에 봤던 외모보다 조금 마른 모습, 그리고 겨울이 다가오는 요즘 시기가 톰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오늘 하루 일탈을 통해 길고양이 시절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오랜만에 겪는 야생동물의 삶에 진이 쏙 빠지면서 느끼는 점이 많았다. 이렇게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매일 살아가는 것은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제리는 혼자 외롭게 힘든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톰은 길을 떠돌면서 살던 때 곁에 친구라는 존재가 얼마나 도움과 힘이 되어주는지 안다. 그래서 그런지 제리의 처지에 대해 더욱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걱정 속에 톰의 발걸음은 자꾸만 멈칫거렸다.
나는 주인의 보살핌 덕에 부족함 없이 편안히 살고 있는 것이겠지.. 정말 감사한 일이야.
이런 생각과 동시에 톰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이 생각나 달리기 시작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일단 집으로 빨리 돌아가야 해...
더 늦었다간 바쁜데도 불구하고 가족들이 자신을 찾으러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톰은 빠르게 자신이 왔던 길을 따라 집을 향해 달려갔다. 일탈을 한 것만으로도 집사에게 혼이 날 만한데 너무 늦었다간 집사가 심하게 걱정할 것 같았다.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은 톰이었기에 발걸음을 더욱 서둘렀다.
그러나, 벌써 어두워졌기 때문인지 공사하고 있는 거리 탓인지 달리던 톰은 낯선 거리에서 멈춰 섰다. 처음 보는 낯선 거리의 모습에 당황하며 자칫 집에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하지만 톰은 애써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며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여기가 어디지...?
분명히 이 길이 맞는데..?
어서 돌아가야 하는데.. 집사가 걱정할 거야.
맞다. 지금 톰은 길을 잃었다. 혼자 길을 거닐 때까지만 해도 분명 오던 길은 기억했는데, 제리를 만나서부터 아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긴장을 풀어버렸더니 모두 까먹었다. 오른쪽? 왼쪽? 어디로 왔더라, 톰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낯선 동네에서 길을 잃은 두려움과 제리의 말에 대한 걱정. 이 두 가지 생각이 톰의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톰은 집에 어떻게 가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남아있는 두려움이 톰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 뿐이었다. 톰이 할 수 있는 것은 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것뿐이었다.
빙글빙글 돌던 톰은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제자리에 멈춰서서 집에 갈 방법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 당시 자신의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했던 방법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톰에게 딱 맞는 해결책이 떠올랐다.
아까 내가 어떻게 이쪽으로 온 거지?
일단 높은 곳에 올라가서 공터를 찾자.
공터만 찾으면 집에 갈 수 있어.
톰은 일단 눈앞에 보이는 집의 지붕에 올랐다. 집 지붕 위에서 주위를 살펴보자 저 멀리 익숙한 거리와 공터가 보였다. 톰은 공터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지붕과 길거리를 오가며 공터에 가까워졌다.
잔뜩 겁을 먹고 골목을 걸은 나머지, 아는 동네가 눈에 보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터에 도착한 톰은 힘이 빠진 채로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다. 드디어 톰은 집을 발견하고는 자신을 반겨줄 가족들을 생각하며 반가운 마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도착하면 가족들이 따뜻한 물에서 씻겨주고 맛있는 밥도 주겠지?
집에 도착한 톰은 내심 자신을 기다리고 걱정했을 집사들을 기대하며 문밖을 서성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집에는 분명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안에서는 집사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를 찾는 듯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해 계속 집안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톰'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주제의 대화는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서운한 마음을 가진 채 톰은 아침에 탈출했던 베란다로 향햤다. 하지만 아침에 열려있던 베란다 창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창문을 기웃거려보기도 하고, 괜히 야옹 소리도 내보았지만 집사들의 시끌벅적한 웃음소리에 이내 묻히고 말았다. 하루 종일 추격전으로 지친 자신의 그림자가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가을밤은 제법 어둡고 쌀쌀해졌고, 당황한 톰은 두려운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왜 나를 찾지 않는 거지?
분명히 내가 집을 나간 지 반나절이 지났는데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건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인 걸까?
나는 이 집에서 도대체 무슨 존재인 거지...?
나는 이제 필요 없는 걸까...
톰은 자신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위축되기 시작했다. 꼬리와 귀는 축-하고 쳐졌다. 톰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듯했다. 꽤나 상쾌하게 느껴졌던 가을 공기는 이제 매섭게 톰을 휘감았다. 어쩌면 그 찰나의 순간 배신감이라는 단어가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을지도 모른다. 톰은 잠깐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톰은 갓 입양되었을 때 모두가 그를 반겼던 것을 떠올렸다. 가족 모두 톰 만을 바라봐주었으며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었다.
비록 대화는 통하지 않지만 그들은 서로 어떤 말을 하는지 다 알 수 있었다.
톰에게 그들과 함께 한 모든 시간들이 무척이나 소중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바빠진 가족들과 그에 따른 톰에 대한 무관심으로 점차 변해가는 톰의 일상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어쩌면 그들이 자신을 찾지 않는 상황은 예고된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자고 일어나 눈을 뜨면 톰의 시야에는 그가 일어나기만을 바라던 가족들로 가득했는데, 지금은 아주 차가운 갈색 바닥만이 톰을 반긴다. 상황을 받아들이고 체념하기 시작한 톰은 터벅터벅 문 앞을 걸어 나와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일탈을 꿈꾸며 집 밖으로 나섰던 아까와는 다르게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걸음 하나에 매 순간 톰을 찍던 가족들의 카메라 렌즈가 떠오르는가 하면, 두 걸음에는 마지막으로 가족들의 눈을 마주한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가족들에게 톰의 존재는 익숙해진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테지만, 톰은 가족들에게 잊혀진 것만 같았다. 그렇게 5분, 10분, ... 30분을 넋이 나간 상태로 걸었다. 더 이상의 생각은 하기 싫어서 그저 걷는 행위에만 집중해서 걸었다.
터덜터덜 길을 걷던 톰은 길거리에 버려진 곰 인형 하나를 발견했다. 버려진 자신의 처지가 쓸쓸해서일까.
오늘따라 유난히 평소 골목에서는 눈에 띄지 않던 인형 하나가 눈에 띈다. 버려진 곰 인형의 모습은 톰이 집에서 본 집사의 곰 인형과는 달랐다. 버려진 곰 인형은 눈이 한쪽 뜯어져 있었고 목에 달린 리본은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곰 인형은 이미 버려진 지 오래된 듯 여기저기에 검게 때가 있었다. 그 인형은 거리를 돌아다니던 길고양이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건물 유리창에 비추어진 톰의 모습 또한 평소 집안에서의 톰의 모습과 달랐다. 슬링키에게 쫓긴 탓인지 온 몸은 이미 먼지로 덮여 있었고 쓰레기 조각들도 여기저기 몸에 붙어 있었다. 말 그대로 거지 꼴이었다. 누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집 고양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이런 꼴이면 집사가 보면 감짝 놀랄 거야.
톰은 오늘 벌어진 일들을 돌아봤다.
그래, 오늘 제리도 만나고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
제리를 생각한 톰은 제리와 같이 살던 때 생각하였다.
그때는 지루한 날이 없었지, 집사들이 나랑 같이 논 적도 많았고
톰은 과거 집사들과 같이 놀았던 기억을 되새겼다.
톰은 과거에 두 딸들과 함께 영화 '토이스토리 3'를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영화를 보며 집사들은 톰에게 말했다.
우리는 톰 너를 정말 좋아해. 우리는 지금도 같이 있지만 앞으로도 쭉 함께 할꺼야.
톰은 영화의 내용과 현재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 주인공 앤디가 커가며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게 되고 장난감들이 앤디에게 서운함을 느끼듯이 톰 역시 큰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지저분한 곰 인형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톰은 곰인형에게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져 곰 인형에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너도 나와 같은 처지구나.. 내가 돌아가는 게 맞을까..? 넌 어떻게 생각해..?
그러나 대답해 줄 리가 없었다. 그저 인형에 불과했으니까.
아무리 인형이라고 해도 이렇게 막 버려져도 되는 거야?
그럼 너는!.... 아니 나는 뭐였던 거냐고!!
그저 가지고 놀다 싫증나면 버리는 이런 장난감에 불과했던거야!?
야 대답 좀 해봐!!!..
톰은 속상하고 화난 마음에 곰 인형을 툭툭 치기 시작했다. 버려진 인형의 모습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해 보였을까? 톰은 들어주지도 않는 곰 인형에게 괜히 화풀이하였다.
그때 부스럭 소리가 들리더니 곰 인형 옆으로 자그마한 꼬리가 보였다.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 작은 꼬리는 방금 전 헤어졌던 제리의 꼬리임이 틀림없었다.
제리..?!
제리는 평소처럼 먹을 만한 것들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거리라 그런지 이 주변에는 먹을 것들이 꽤나 많았다. 그래서 제리가 자주 오는 곳 중 하나였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먹을 것을 찾기 다소 어려웠다. 땅에 코를 박고 음식 찾기에 열중하고 있던 중, 고양이 소리가 났다. 순간 긴장이 되었지만 자신을 '제리'라고 불렀다는 것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톰....? 여긴 어쩐 일이야?
집에 가는 거 아니었어? 왜 또 밖인 거야..?
제리는 어딘가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한 톰에게 다가갔다.
톰..? 무슨 안 좋은 일 있었니..? 슬퍼 보여..
외로움과 허탈감에 방황하던 톰 앞에 제리가 나타나다니, 톰에겐 기적 같은 행운이었다. 톰은 제리를 보자마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뚝뚝 흘렀다. 톰의 눈물을 처음 본 제리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톰! 왜 울어!! 너 원래 잘 안 울잖아... 무슨 일인데,,, 말해봐!
톰은 마음을 가다듬고 제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집사들이 걱정할 줄 알고, 잠시 밖을 나왔다가 빠르게 돌아갔는데..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눈치야.
내가 나간 줄도 모르는 건지 다들 하하호호하고 있더라구..
톰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리는 톰을 향해 몸을 돌리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집사들? 내가 살던 그 집의 인간들을 말하는 거야?
그래 집의 주인들, 난 집사들이 내 가족과 같은 존재라 생각하고 있지만 집사들은 그렇지 않나 봐
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굴을 찌푸리던 제리는 이렇게 말했다.
톰! 이렇게 해보는 건 어때?
내가 선물 상자를 만들어줄 테니, 일단 그걸 집에 들고 가.
그다음엔 내가 초인종을 누를 거고, 그사이에 너는 선물 상자에 들어가 있는 거지.
그들은 너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될 거야.
톰은 솔깃했다.
예전부터 제리는 여러 아이디어로 자신과 집사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그는 뛰어난 재치와 상황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톰보다 훨씬 작은 몸을 가지고도 언제나 톰을 약 올릴 수 있었다. 또한, 제리는 톰이 곤란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여러 해결책을 제시해주곤 했었다.
제리의 도움을 받을 때마다 항상 좋은 결과만이 있었기에, 톰은 제리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이번에도 제리는 좋은 해결책을 제시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좋아. 한 번 해보자!
덕분에 가족을 놀라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고마워!
아까와는 달리 기분이 좋아진 톰은 제리와 함께 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톰~! 혹시 이사가기 전 자주 했던 내기 기억나?
톰이 잠시 멈춰서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톰은 잠시 제리와 함께했던 시간을 생각한다.
혹시 그때 끝내지 못한 달리기 시합을 하자는 거야?
제리는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날쌔게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앗! 기다려!!!
톰이 제리와 함께 살았을 때, 톰은 제리와의 달리기 내기에서 이긴 적이 없었다. 새끼 고양이였던 톰의 몸은 지금처럼 크지도, 날렵하지도 않았었다. 어린 톰의 몸은 계속 자라는 중이었고, 톰이 원하는 만큼 빠른 속도를 내기 힘들었다. 이런 톰을 날렵한 제리가 이기는 건 쉬운 일이었다. 언제나 제리의 뒤를 쫓던 '톰과 제리'의 한 장면처럼, 언제나 제리의 뒤엔 톰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 자란 톰은 달랐다. 세월이 지나고, 톰은 예전의 아기 고양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자란 상태였기 때문이다. 톰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제리! 이제는 내가 너보다 빨라~ 이제는 내가 내기에서 항상 이길걸?
톰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리를 추월해 내기에서 이겼다. 제리는 전보다 빨라진 톰의 달리기 속도에 놀랐다. 내기가 끝난 후 제리가 말했다.
못 보던 사이 너 아주 많이 자랐구나?
항상 내기의 승자는 나였는데!! 언젠간 다시 내가 이기고 말 테야!
우리 다음에 또 내기하자.
내기에서 이긴 톰은 아까보다 조금은 밝아진 모습이었다. 제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별것도 아닌 내기였지만 덕분에 톰의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 다행이군.
내기에서 이긴 톰은 기분 좋은 모습으로 제리와 함께 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집 앞에 도착한 톰과 제리는 서둘러 일을 진행했다. 그들은 근처 쓰레기봉투에서 톰이 들어갈 선물상자를 가져왔다. 선물상자는 버린 지 얼마 안된듯, 깔끔한 모습이었고 톰이 들어가기에 딱 맞는 크기였다. 이들의 기대는 더욱 부풀어져만 갔다.
자, 이제 선물상자는 준비됐어.
내가 초인종을 누르면 뜸 들이지 말고 재빨리 들어가야 해!
휴... 떨리는걸
띵-동
제리는 재빨리 밸브 선을 타고 올라가 초인종을 누른 후 계단 뒤로 몸을 숨겼다. 톰도 초인종이 울리자 바로 선물상자로 들어갔다. 그들 저마다 숨을 죽이며 집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잠깐의 시간이 너무 조마조마하게 느껴졌다.
누구세요? 와 치킨 벌써 왔나보다~
톰은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랄 집사의 모습을 상상하며 부푼 기대감을 안고 선물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톰의 상상과는 다르게 문을 연 집사의 표정엔 실망감이 가득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그 표정이 톰에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뭐야 너였어? 선물 상자에는 어떻게 들어간 거람. 장난하지 말고 얼른 들어와~
문을 열어 두고 집에 들어가는 집사.
그들은 정말로 반나절 동안 톰이 없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톰을 찾으러 나가지도 않았던 것일까?
잠깐의 시간동안 오만가지 생각들이 톰을 괴롭혔다.
그런 톰을 제리는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톰의 눈에는 이내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렇게 무관심할 수가 있나?
너무나도 섭섭하네...
예상과 다른 반응에 놀라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톰은 눈물을 닦으며 상자에서 천천히 나왔다. 인기척이 사라진 현관에는 톰의 마음도 모른 채 불빛이 사라졌다. 톰은 현관에 놓인 신발 몇 개를 잠시 지켜보았다.
제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안쓰러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어쩌면 이제는 행복한 가족들에게 나는 필요 없을 지도 몰라...
예전과 달리 가족들은 바쁜 생활때문에 톰을 신경쓰지 않았고, 점점 그들 곁에서 멀어져만 간 것이다. 톰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예전에 가족들과 함께한 추억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애써 부인했었다. 열린 현관문 사이로 들려오는 tv소리, 그리고 가족들의 말소리는 톰의 마음을 계속해서 후벼팠다.
톰은 여태까지 외면했던 가족을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직감했지만, 지금까지 함께한 추억이 톰의 발걸음을 쉽사리 놔주지 않고 있었다. 그런 톰의 마음을 잘 알고 있던 제리는 톰이 얼른 마음을 부여잡고 새 주인을 찾기를 원했다.
톰.. 그러면 우리 같이 너의 새로운 가족을 찾아보자.. 이곳을 떠나서 말이야
제리는 톰을 안아주었다. 톰은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슬며시 문을 닫았다. 자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집사들이 아닌, 자신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돌보아 줄 집사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그렇게 톰과 제리는 함께 집앞을 떠나 천천히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골목에는 금방이라도 상처받은 톰의 마음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환한 달이 떠 있었다.
집사에 대한 실망감에 도망치듯 뛰쳐나온 톰은 쉽사리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톰의 마음을 눈치챈 제리는 톰의 얼굴을 살핀다.
톰..? 괜찮아..?
제리가 조심스레 톰을 위로한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은 안 괜찮아...
이제 어떡해야 하지.. 무작정 나오기는 했는데 정말로 날 위해줄 집사를 찾을 수 있을까..?
제리는 과거의 톰을 떠올렸다. 겁 많고 모든 것이 두려웠던 작은 톰은 가족을 만나면서 점차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고, 호기심 많고 자신감 넘치는 고양이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그런 톰이 인간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이렇게 나약해지는 모습을 보니 제리는 마음이 안좋았다. 톰의 친구로서, 변해버린 그의 집사들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제리는 톰이 이대로 무너지게 둘 순 없었다.
톰! 그런 생각 하지 마! 기운 내!!! 너 같은 매력 넘치는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널렸어!!!
기억 안 나? 너 예전에 "만인의 냥이" 타이틀 소유자였던 걸 잊은 거야???!!!
맞아... 그랬었지..!!
좋았어! 집사가 나를 선택하였듯이 이제는 내가 집사를 선택 할 거야!
고마워 제리!!
그래, 제리의 말이 맞았다. 자신처럼 멋진 고양이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깟 집사는 새로 찾으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톰은 다시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한때의 작고 약한 톰은 이제 없었다. 수많은 일을 거친 톰은 이젠 강하고 단단한 어른 고양이였다. 이것은 집사들에게 한 번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붉은색이 넘실대던 세상은 이제 검게 물들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할머니가 톰과 제리 앞에 멈춰 섰다. 눈앞에 사람이 나타난 것을 본 톰은 제리를 재빠르게 꼬리 밑으로 감추고 경계 태세를 하고 있었다. 집고양이였던 톰조차도 너무 갑작스러운 할머니의 등장에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자신을 해칠 사람은 아닌 것 같았고, 제리를 지키고자 할머니 앞에 당당하게 서있었다.
톰이 올려다본 할머니는 굽은 허리로 서있었다. 그럼에도 눈높이가 꽤 높은 것이 젊었을 적에 얼마나 기골이 장대했을지 어림이 가는 모습이었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이었지만 야행성인 톰이 할머니를 살피는 데에는 어떤 방해도 될 수 없었다. 톰은 할머니의 얼굴을 살폈다. 할머니는 한복을 입고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시간 조용한 대치가 이어지고 이윽고 할머니의 입이 열리었다.
사이 좋은 쥐와 고양이로구나. 본디 고양이는 쥐의 천적일텐데, 그만큼 너희들의 인연이 남다르다는 것이겠지.
다만 너 고양이. 너는 아직 많이 어리군. 나이는 먹었지만 여전히 세상을 좁게만 바라보는구나.
내가 너희들에게 선물을 주마.
할머니는 톰의 목에 작은 주머니를 걸어주었다.
위험이 닥칠 때마다 이 복주머니를 풀어보렴. 분명 도움이 될 게야.
우린 다시 만나게 될게야. 그때까지 이 복주머니에 너가 느끼는 많은 세상의 경험들을 채워오거라.
톰은 어안이 벙벙하였지만, 일단 가만히 있었다.
설마, 목에 딸랑이를 달아준건 아니겠지? 뭐야? 뭐를 나에게 단거야!
아까 그 말은 또 무슨 말인거지?
그리고 할머니는 나타날 때와 같이 갑자기 안개처럼 사라졌다. 눈앞에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굳어 있던 톰 꼬리 뒤에서 제리가 나왔다.
톰! 무슨일이야! 휴, 덕분에 산거같아 고마워 톰.
어? 목에 이쁜 주머니가 달렸네!
제리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톰의 목에 걸려있는 작은 주머니를 가리켰다. 주머니는 오색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무언가를 담을 수 없을 것 같은 크기의 주머니지만 어딘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위기가 닥치지 않아서였을까. 톰은 주머니를 툭툭 건드려보며 열어보려 했지만 주머니는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주머니가 열리지 않자 포기한 톰은 아무래도 좋다는듯 제리를 보고 말했다.
고마워할 것 없어 너도 나를 도왔잖아 내가 인간으로부터 너는 꼭 지켜줄게 제리! 딸랑이가 아닌 주머니여서 다행이다.
비록 돌보아주는 인간은 없지만, 제리가 톰의 모습을 봐주고 톰은 제리를 사람으로부터 보호하면서 서로를 돌보아주는 따뜻한 밤이었다.
이제 앞으로 우리가 가는 길에 큰 행운이 올 것만 같아.
제리가 웃으며 말했다.
톰은 걱정도 많았지만 한편으론 기대도 되었다. 지금까지의 지겹던 일상과는 다른 새로운 일상이 시작될 것 같았다. 캣타워에 드러누워 하염없이 집사를 기다릴 바에 자신이 새로운 집사를 찾아나서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사를 찾기 위한 모험은 분명 힘들겠지만 그보다 다양한 경험을 할 생각에 톰의 기분이 고양되기 시작됐다.
새로운 곳으로 떠나 다양한 걸 보고, 즐기고 싶어. 그리고 날 더 바라봐 줄 수 있는 집사를 찾을 거야
톰은 대단한 결정이라도 내렸다는듯 폼을 잡고 먼산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파리가 날아와 톰의 코 위에 앉았다.
에취!!!!
제리가 웃음을 참지못하고 배를 움켜잡으며 뒹굴었다.
겨우 웃음을 멈추고 제리가 말했다.
아이고 배야... 웃겨서 죽는 줄 알았어 톰!
하지만 톰, 모험이라니 어디로 갈 생각이야?
제리가 물었다.
음... 어디로 가지?
톰은 곰곰이 생각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오랜 시간 집에서만 생활하던 톰에게 새로운 곳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떠나봤자 이 세상에는 전부 바쁜 집사들뿐이야...게다가 매일 비슷한 풍경도 지겨워...
여기와는 다른 집사들과 재미있는 친구들이 있는 곳은 없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톰은 끝끝내 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톰이 보던 바깥세상은 집사가 보던 TV 속의 세상들이었다. 그리고 톰은 TV 속의 세상들이 실존한다고 믿었다.
...
아!
집사가 보던 TV에서 멋있는 세계들을 많이 봤어! 티비에서 노을을 넘어가면 모든걸 이뤄주는 마법사가 산대!
그곳으로 가서 우리 각자 소원을 빌면 되지 않을까!
노을을 따라가면 그곳에 갈 수 있을거야!
TV는 무수히 많은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곤 했었다. 끝없이 펼쳐진 물,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나무가 빼곡한 숲, 그저 모래만으로 이루어진 땅 등... 그리고 그런 곳을 배경으로 사람들, 가끔은 사람이 아닌 무언가의 이야기가 TV를 통해 흘러나오곤 했다.
톰은 집사가 그런 이야기를 보며 즐거워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지켜보곤 했다. 집사는 항상 톰에게 저렇게 멋진 곳에 꼭 데려가주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했다. 톰은 못 알아들은 척 했지만 속으로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세상을 알게 해준 집사는 오늘따라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막상 집사와 헤어진다고 하니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런 멋진 세상을 알려준 집사에게 고마우면서도, 그 세계로 떠나려는 마음을 가지게 만든 집사가 미웠다. 하지만 톰에 대한 관심이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고도 차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톰은 결심했다. TV에 나오던 '노을 너머의 세계'를 향해 모험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그 모험 속에서 자신을 진정 필요로 해주는 존재를 찾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아니 찾지 못 할수도 있다. 하지만 톰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해 했다. 그리고 톰은 그의 모험을 함께해 줄 동료이자 친구가 있었다. 톰은 말했다
제리 너도 노을 너머의 세계에 가줄 거지? 너와 함께 떠나면 외롭지 않고 정말 즐거울 것 같아.
제리는 당황했지만 즐거운 모험이 될 거라 생각해 수락했다.
어...어?? 알았어!!! 나라도 괜찮다면 네 곁에 있어줄게.
제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톰이 무척이나 주인에게 실망하였구나. 나라도 같이 있어야 톰이 슬프지 않겠지.
톰, 어디라도 우리 둘이 함께라면 진짜 재미있을 거야.
이세계든 어디든 함께 가자고
제리가 톰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톰은 제리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망설였다. 주인에게 무척 실망했지만 주인 품 밖으로 나가 산다는 것은 익숙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제리의 반짝이는 눈을 보면서 톰은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톰은 결심한듯한 표정을 짓고 제리 위 손등 위에 손을 포개며 말했다.
그래 제리, 우리 한번 노을 너머 세계에 가보는 거야!
둘은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어딘지 모를 노을 너머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떤 많은 일들이 기다릴지 이 둘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 그 일들은 재밌고 흥미로운 일들로 가득 차 있을 거라 톰과 제리는 굳게 믿었다.
그때, 낯선 이의 시선을 느낀 제리가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으슥한 밤거리에는 톰과 제리를 제외한 그 어떤 생명체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 제리? 혹시 많이 무서운 거야?
아니, 그냥 누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 탓이겠지 뭐, 어서 가자!
둘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나란히 걷고 있는 그들 뒤, 한복의 옷자락이 펄력였다.
근데 톰! 노을 너머 세계라는 곳을 우리가 찾아갈 수는 있겠지?
실존하는 곳은 맞아??
나는 처음 들어보거든..
응! 거기는 분명 존재하는 곳이야!
나만 믿으라고! 어서 가자~
그들의 눈은 어느새 긴장감이 걷히고 새로운 모험에 대한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톰! 나도 갑자기 너무 설레!
노을 너머 세계에 가면 맛있는 것들도 많고, 쓸데없는 걱정들은 필요가 없겠지??
우리 빨리 노을 너머 세계에 가서 행복하게 살자!
그럼그럼~
이세계에 도착하기만 하면 우리는 아무 근심 걱정없이 살 수 있을거야!
우리 힘내자!
나만 믿으라고 제리에게 확신을 준 톰이었지만, 지도없는 항해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집고양이와 길고양이는 경험치가 다르다. 톰도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집고양이는 의식주가 다 제공되고 보호해줄 사람도 존재한다.
하지만 길고양이는 의식주도 직접 찾아야하고 보호해줄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이 직접 모든것을 다 해야한다.
경험해보지 못한 큰 세상에 발을 딛는것이므로 어떠한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른다.
잠시 망설였지만 지금은 두렵지는 않다. 앞으로의 모험이 기대될 뿐이다.
어둠속으로 사라져가는 태양을 놓칠수 없다는 듯이 따라가는 톰과 제리. 둘은 암묵적으로 길바닥에 방랑자가 된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각각 자신만의 천국을 생각중이다.
노을 너머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어떤 소원을 빌까?
노을 너머 세계는 분명 참치캔으로 가득차있을 거야! 따뜻한 방과 캣타워 캣닢까지! 기대된다.
노을 너머 세계에 대한 설렘을 품으며 그들은 생각한다. 제리는 치즈가 쌓여있는 따뜻한 방을 떠올리고 톰은 참치캔이 가득 쌓여있는 자신만의 천국을 상상중이다. 설렘을 가득 품으며...
한편 어둠속으로 사라져가는 태양을 놓칠수 없다는 듯이 따라가는 톰과 제리를 보며 뒤따라오는 그림자 하나가 있다. 지금까지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앞으로는 더 많은일이 일어날 것이다.
나를 농락했겠다?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들에게 복수를 준비하는 슬링키를 포함해 그들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