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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서울역사 | 서울특별시 웹사이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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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
/* ie 10 과 ie edge 크로스 브라우징 핵*/
@media screen and (-ms-high-contrast: active), (-ms-high-contrast: none) {
#header .headerBot nav .gnb LI.allMen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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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ader .headerBot nav .gnb LI.sear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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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 src="js/scrollTop.js"></script>
<script src="js/mainGnb.js"></script>
<script src="js/jquery.color.js"></script>
<script>
/* 1) 첫번째 내용패널만 보이게 만들기
대상: 첫번째 내용패널만
효과: 보이게 만들기
2) 첫번째 제목탭을 클릭하면 첫번째 내용패널보이게 만들기
대상: 첫번째 제목탭을 $(".historyTab>li:eq(0)>a")
이벤트: 클릭하면 click
이벤트 핸들러: 첫번째 내용패널보이게 만들기 $("#tab1").show();
*/
$(document).ready(function(){
// 1) 초기화
// 2) 내가 선택한 것만 효과
// 3) 탭키를 클릭하면 제목탭에 .selected클래스 적용
$(".historyWrap:not(:first)").hide(); //클릭하기전 첫번패널만 빼고 숨기기
$(".historyTab>li:eq(0)>a").addClass("selected"); //클릭하기전 첫번탭a만 선택
$(".historyTab>li>a").click(function(){ // > 직계자식만
$(".historyWrap").hide(); //초기화
$(".historyTab>li>a").removeClass("selected"); //초기화 모든 탭 a
//$( "#tab1" ).show();
$( $(this).attr("href") ).show();
// a href="#tab1" / a href="#tab2" / a href="#tab3" => a 태그에 적용되어있는 href 검사해서 보여준다
$(this).addClass("selected"); // 탭키를 클릭하면 제목탭에 .selected클래스 적용
return false //a 태그와 click이 만나면 페이지 올라가는것 방지
});
});
</script>
</head>
<body>
<!--바로가기 메뉴 => skip navigation, h태그 필요없음 , base.css에 있음-->
<ul id="skipnav">
<li><a href="#gnba">주메뉴 바로가기</a></li><!--gnb의 첫 번째 a에 id gnba 넣어줌-->
<li><a href="#maina">본문내용 바로가기</a></li>
</ul>
<!-- skip nav END -->
<div id="wrapper">
<!-- ############## header.php 넣기-->
<?php include "common/header.php"; ?>
<div id="content">
<h2>주요 컨텐츠</h2>
<div class="breadInner">
<ul class="breadcrumb">
<li class="gohome"><a href="#" title="홈 바로가기"><img src="image/icon_home.png" alt="홈 아이콘"/></a></li>
<li><a href="#" title="서울뉴스 바로가기" >서울 뉴스</a></li>
<li>
<a href="#" title="새소식 바로가기">
새소식
<span class="breadDown"><img src="image/icon_arrowDown.png" alt="down arrow"/></span>
</a>
</li>
</ul>
</div>
<section class="historyInner">
<h3>서울의 역사</h3>
<ul class="subnav">
<li class="subnavL"><a href="#" title="이전 페이지">previous</a></li>
<li class="subnavR"><a href="#" title="다음 페이지">next</a></li>
</ul>
<div class="historyTop">
<img src="image/history.jpg" alt=" 서울 경복궁"/>
</div>
<ul class="historyTab">
<li>
<a href="#tab1">고대서울</a>
<div class="historyWrap" id="tab1">
<dl class="history">
<dt>
<span class="hisNum">1</span>
<strong>선사시대</strong>
<span>기원전 8,000~7,000년</span>
<span>~ 기원전 13세기 무렵</span>
</dt>
<dd>
<strong>서울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다.</strong>
<p>선사시대란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의 시대로 구석기, 신석기 시대가 이에 해당한다. 한강 유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로 강남구 삼성동 50번지 일대에서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 등 구석기 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것은 신석기 시대이며, 신석기 시대 유적은 서울 곳곳에서 발굴되었는데 이중 대표적인 것이 강동구 암사동 유적이다.
</p>
<p>
청동기 시대는 본격적인 농경기 문화가 시작되는 때로 강남구·강동구·송파구 등에서 청동기시대 집터가 발굴되고 한강 유역에서는 청동기 시대에 널리 사용되던 민무늬 토기인 가락동식 토기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특히 한강유역에는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계급사회가 성립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이러한 정치적 집단이 이후 백제 건국에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p>
<ul>
<li><img src="image/his1.jpg" alt="선사시대 유적지"/></li>
<li><img src="image/his2.jpg" alt="선사시대 유적지"/></li>
</ul>
</dd>
</dl>
<dl class="history">
<dt>
<span class="hisNum">2</span>
<strong>고대시대</strong>
<span>백제의 지배 : BC 18 ~AD 475</span>
<span>고구려의 지배 : AD 475 ~ AD 551</span>
<span>신라의 지배 : AD 551 ~</span>
</dt>
<dd>
<strong>서울은 500년간 백제의 수도였다.</strong>
<p>기원전 18년, 백제는 위례성을 수도로 하여 나라를 세웠다.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가 위례성이 위치했던 곳으로 위례성은 후에 큰 성이란 뜻인 한성 혹은 대성이라는 명칭으로도 불 렸고, 왕이 거주하던 곳이란 뜻으로 왕성이라고도 불렸다.
</p>
<p>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에 의해 한성이 무너지면서 백제가 공주로 수도를 옮기게 되지만 493년간 백제의 수도였던 탓에 서울 곳곳에서 백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송파구 풍납토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송파구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에 가면 실제 백제 고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근방을 중심으로 백제인들이 사용 한 토기, 기와, 농기구, 유리 제작에 쓰인 거푸집 등 다양한 백제의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p>
<ul>
<li><img src="image/his3.jpg" alt="백제지대 유물"/></li>
<li><img src="image/his4.jpg" alt="백제지대 유물"/></li>
</ul>
</dd>
</dl>
<dl class="history">
<dt>
<span class="hisNum">3</span>
<strong>고대시대</strong>
<span>백제의 지배 : BC 18 ~AD 475</span>
<span>고구려의 지배 : AD 475 ~ AD 551</span>
<span>신라의 지배 : AD 551 ~</span>
</dt>
<dd>
<strong>서울에는 삼국의 문화유적 다 있다</strong>
<p>475년 백제에게 한성을 뺏은 고구려는 사령부를 몽촌토성에 두고 한강 건너편 아차산에 보루를 설치해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몽촌토성에는 백제의 유물 뿐 아니라 고구려 사람들이 사용한 토기와 와당 등도 발견되었고 고구려 사람들이 설치한 보루를 아차산, 망우산, 수락산 등지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고구려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다툼과 돌궐의 침략으로 힘이 약해졌고, 551년 신라, 가야, 백제의 연합군에 밀려 76년간 차지했던 한성에서 쫓겨나 북쪽으로 물러나게 된다.
</p>
<p>
한성을 차지해 중국과 직접 교류하고 싶었던 신라는 다시 고구려와 협약을 맺고 백제를 무너뜨려 554년에 신라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확보하게 된다. 신라의 진흥왕은 한성 지역이 신라의 영토임을 공고히 하기 위해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북한산진흥왕순수비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서울을 지배했던 탓에 서울에는 신라의 유물이 많이 발견된다. 북한산진흥왕순수비 뿐 아니라, 보물 제 235호인 장의사 당간지주, 다양한 신라 고분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서울과 가까운 광주 남한산성, 하남시 이성산성에도 신라 유물이 많이 출토 되었다.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의 문화유산이 모두 발견된 곳은 서울지역 뿐으로 이것이 고대 서울 역사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p>
<ul>
<li><img src="image/his5.jpg" alt="삼국지대 유물"/></li>
<li><img src="image/his6.jpg" alt="삼국지대 유물"/></li>
</ul>
</dd>
</dl>
</div><!--historyWrap END-->
</li>
<li>
<a href="#tab2">중세서울</a>
<div class="historyWrap" id="tab2">
<dl class="history">
<dt>
<span class="hisNum">4</span>
<strong>고려시대</strong>
<span>고려의 지배: AD 898 ~</span>
</dt>
<dd>
<strong>고려시대, 서울의 이름은 “남경"</strong>
<p>신라를 귀속시키고 후백제를 정복하여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고구려의 후계자란 뜻으로 ‘고려’ 란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다. 당시 서울은 ‘양주’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편리한 교통과 풍부한 물산 등 유리한 자연지리적 여건 때문에 1067년 고려 제방 제도상 최고 지위 중 하나인 ‘남경’ 으로 승격된다. 이후 다시 양주로 격하되었다가 남경으로 격상되는 변화를 겪었지만 1101년 이후부터 고려말까지는 남경으로 승격되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고려말 공양왕 당시, 왕조가 혼란스러워지자 난세를 타계하기 위해 당시 ‘한양’이라 불렸던 서울로 수도를 이전하지만 정치상황이 더 불안해지는 바람에 6개월 만에 개경으로 다시 수도를 이전하는 혼란을 겪는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한양을 수도로 지목하면서 서울은 조선의 수도로 거듭나게 된다.
</p>
<ul>
<li><img src="image/his7.jpg" alt="선사시대 유적지"/></li>
<li><img src="image/his8.jpg" alt="선사시대 유적지"/></li>
</ul>
</dd>
</dl>
<dl class="history">
<dt>
<span class="hisNum">5</span>
<strong>조선 시대</strong>
<span>조선의 수도로 천도 : AD 1394 ~</span>
</dt>
<dd>
<strong>서울, 조선의 수도로 거듭나다.</strong>
<p>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 조선을 창건하고, 1394년 한양을 조선의 수도로 확정한다. 1395년 경복궁과 종묘·사직단이 준공되고 1405년 창덕궁이 낙성되면서 한양을 중심으로 한 실질적인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가 시작된다. 조선은 수도 한양을 보호하기 위해 백악(북악산), 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을 따라 약 18킬로 미터의 성곽을 쌓았고, 왕의 생활공간이자 통치공간인 궁궐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을 지었다. 이 곳을 조선의 5대궁이라 하며 조선의 왕이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은 창덕궁이다.
</p>
<ul>
<li><img src="image/his9.jpg" alt="백제지대 유물"/></li>
<li><img src="image/his10.jpg" alt="백제지대 유물"/></li>
</ul>
</dd>
</dl>
<dl class="history">
<dt>
<span class="hisNum">6</span>
<strong>조선 후기 서울</strong>
<span>조선의 수도로 천도 : AD 1394 ~</span>
</dt>
<dd>
<strong>폐허를 딛고 문화의 꽃을 피우다.</strong>
<p>
조선 후기가 되면 종로 중심인 시전상인에서 벗어나 중구 청계천변 일대, 동대문 이현과 남대문 칠패 시장까지 상업지역이 확대된다. 또한 한강의 용산·마포·서강·송파 등 포구를 중심으로 한 경강상인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조선 초부터 정치·경제의 중심이었던 서울은 전국 최대의 수공업 단지이기도 했다. 수공업단지는 주로 종로구와 중구 일대에 집중해 있었는데 종로구에는 왕실 의복을 만들던 상의원과 음식과 음식 담는 그릇을 만들던 사옹원이 있었고 창의문 밖에는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 등이 있었다. 이러한 수공업의 영역이 조선 후기에는 도성 밖으로 확대되면서 조선 경제를 활성화하고 서울이 조선 후기 상공업도시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새롭고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하는 실학이 젊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고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파가 탄생하게 된다. 실학의 대두로 인해 서양의 과학기술이 조선에 들어왔고 천주교 사상이 함께 전파되기도 했다. 초기 천주교는 학문적 차원에서 연구되다가 차츰 신앙으로 발전했으나 성리학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교리 때문에 결국 박해를 받았고 현재 양화대교 옆 잠두봉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가 처형되었다.
</p>
<ul>
<li><img src="image/his11.jpg" alt="삼국지대 유물"/></li>
<li><img src="image/his12.jpg" alt="삼국지대 유물"/></li>
</ul>
</dd>
</dl>
</div><!--historyWrap END-->
</li>
<li>
<a href="#tab3">근대서울</a>
<div class="historyWrap" id="tab3">
<dl class="history">
<dt>
<span class="hisNum">7</span>
<strong>근대서울</strong>
<span>1895. 10. 8 을미사변</span>
<span>1897. 10. 12 대한제국 선포</span>
</dt>
<dd>
<strong>문을 열고 국제무대로 나서다.</strong>
<p>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후 270년이나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은 1868년에야 중건되었다. 경복궁 중건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오랜 세도정치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진행했던 것이다.
조선을 향한 서구 열강의 끈질긴 개항 요구와 침입이 있었고, 조선은 프랑스군과 미국군이 침입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격퇴하기도 했지만 결국 1876년 부산·인천·원산 등의 항구를 개방했고 서구 열강과 조약을 맺었다. 당시 조약 내용을 보면 관세 주권에 제한을 두는 등 불평등한 내용이 많았다. 이에 따라 조선의 상권이 외국 상인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일이 많아지고 일반 서민의 생활이 곤궁해졌다.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승리하고 대한제국의 금융과 재정을 장악하면서 조선 상인들의 몰락이 가속화 됐지만 국채보상운동, 식산흥업운동, 근대교육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조선의 상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끊이지 않았다.
</p>
<p>
1870년대 중반 무렵 한성의 젊은 양반들 사이에 개화사상이 퍼지면서 하나의 세력이 형성되었다. 그 중 김옥균 등의 무리가 청 세력을 몰아내고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1884년 12월 4일 우정국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신정권을 수립하지만 청군의 공격에 의해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게 된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우정국 옛터는 현재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1895년 5월 삼국간섭이후 조선에서의 일본의 위신이 급격히 추락하자 일본은 그 배경에 명성황후가 있다고 판단한다. 이는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의 발단이 되어 1895년 10월 8일 일본군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머무는 건청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명성황후 시해로 인해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범인인 미우라 공사 등을 구금하지만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석방해 버린다.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궁녀들이 타는 가마에 몸을 숨기고 정동에 있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데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p>
<ul>
<li><img src="image/his13.jpg" alt="선사시대 유적지"/></li>
<li><img src="image/his14.jpg" alt="선사시대 유적지"/></li>
</ul>
</dd>
</dl>
<dl class="history">
<dt>
<span class="hisNum">8</span>
<strong>민족독립운동기</strong>
<span>1905. 11. 17 을사늑약</span>
</dt>
<dd>
<strong>민족독립운동기 서울, 시련을 겪다.</strong>
<p>덕수궁 근처 골목길 안쪽으로 가면 1900년 러시아 건축가가 지은 최초의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인 중명전이 있다. 중명전은 1905년 11월 대한제국이 일본제국과 을사늑약(을사조약)을 맺은 곳 이다. 황제의 옥쇄도 날인되지 않고 무력으로 맺은 조약에 반발해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이란 사설로 협약의 부당함을 토로했고 민영환은 협약에 항거하여 자살하고 안중근 의 사가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등 전국 각처에서 반일 여론이 확산되고 일본을 처단하려는 의병투쟁이 크게 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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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한 후 일본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서울의 인구밀도가 높아졌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인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던 남대문로와 을지로, 충무로 일대를 중심으로 서 울의 도로와 구역을 개수한다. 그러나 한국인이 다수 거주하는 종로 북쪽은 개발을 진행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은 식민 통치 권력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서울 곳곳에 서양식 건물을 건설하고 전시 공업화를 위해 용산과 영등포 일대에 중화학공장을 대거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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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일본인 거주자와 기업가가 늘어나면서 지금의 명동에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이 1906년 열렸고 1920년대에는 죠지아 백화점, 미나카이백화점 등이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 집중적으로 들어섰다. 조선시대 육의전이 밀집해 있던 종로에는 한국인 최초로 박흥식이 1931년 화신백화점을 열었고, 1934년에는 전국에 체인점을 개설하고 37년에는 지하 1층에서 6층까지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초현대식 건물로 변신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경성의 변화에 따라 서울시민들의 생활 모습도 많이 바뀌었다. 북촌에는 전통 한옥 대신 문간방과 사랑방이 없어진 개량 한옥이 늘어났고 커피나 맥주를 파는 카페, 케익이나 카스테라 같은 고급빵을 파는 곳도 등장했고 거리에는 국화빵이나 중국식 호떡을 파는 곳도 생겼다. 전기도 일반 가정으로 보급되었고 1910년대에는 가로등이 켜질 정도로 전기 사용이 일상화 되었지만 이는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으로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은 1930년대까지도 밤에 호롱불을 밝히고 장작으로 취사와 난방 연료를 대체했다. 1920년대 들어서는 전차가 대중교통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9인용 승합택시도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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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img src="image/his15.jpg" alt="백제지대 유물"/></li>
<li><img src="image/his16.jpg" alt="백제지대 유물"/></li>
</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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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
<li>
<a href="#tab4">현대서울</a>
<div class="historyWrap" id="tab4">
<dl class="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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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class="hisNum">9</span>
<strong>해방시대</strong>
<span>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span>
<span>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span>
</dt>
<dd>
<strong>서울, 대한민국 수도로 출발</strong>
<p>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서울은 식민지 수도 경성에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38선을 경계로 미국군과 소련군이 각각 진주하게 되고 두 연합군이 신탁통치안을 제안하면서 반대하는 우파와 찬성하는 좌파간의 대립이 격렬해졌다. 대표적인 정치지도자로는 이승만과 김구를 들 수 있다. 이화장에서 기거하던 이승만은 1948년 7월 20일 제헌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민족운동가 여운형은 경교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분단 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에 열정을 불살랐지만 안두희에 의해 시해되는 불운을 겪는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은 다시 폐허가 되고 만다. 전쟁 동안 150만 서울 시민 중 110만 명 이상이 서울을 떠났다가 돌아왔을 정도로 서울이 피해는 막심했다. 1953년 9월 전 쟁이 끝난 후에야 새로운 도시 건설에 주력할 수 있었고, 제분·제당·방적 등 원조 물자를 이용한 제조업에 제일 먼저 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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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시에서 서울시로 명칭이 공식적으로 바뀐 것은 미군정이 서울시헌장을 발표하고 한달이 지난 1946년 9월 28일이며 1949년에는 서울특별시로 전환되고 1962년부터 서울시는 국무총리 직속의 행정기구가 된다. 초대 정권인 이승만 정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독재정치로 변질되었고,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를 저지른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과 시민들에게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시민의 분노가 전국적으로 폭발하였고,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게 된다. 부정선거와 경찰의 폭력에 반발하면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한 4·19혁명 의 성공으로 대한민국에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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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
<li><img src="image/his17.jpg" alt="선사시대 유적지"/></li>
<li><img src="image/his18.jpg" alt="선사시대 유적지"/></li>
</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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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
<dl class="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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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class="hisNum">10</span>
<strong>서울특별시</strong>
<span>1986. 아시안게임</span>
<span>1988 서울올림픽</span>
<span>2002 월드컵 개최</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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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서울특별시, 세계의 메트로폴리스로</st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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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박정희 정부 이후 70년대 말까지 연평균 9퍼센트라는 경이로운 경제성장을 이루며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서울의 면적도 지속적으로 확장되는데 1963년 양주군·광주군·시흥군·김포군·부천군 일부가 서울시로 편입되었고, 1973년 약 605제곱킬로미터로 확장된다. 서울에 지하철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74년 8월 15일로 서울-수원, 서울-인천, 용산-성북, 서울-청량리 총 98.7킬로미터에 달하는 구간이었다. 이것이 지금 말하는 지하철 1호선에 해당한다. 한적한 농촌지역이었던 강남은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었고 강남개발의 필요성에 따라 1969년 말부터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1970년대 서울시정의 최대과제는 ‘강북인구집중억제’ 정책 이었고 이에 따라 영동지구 개발이 가속화, 강남개발촉진이 진행되었다. 강북에 있던 유서 깊은 고등학교를 대부분 강남으로 이전시켰는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강남으로 이전하였고 강남이 교육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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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86서울아시안게임 개최, ’88서울올림픽 개최이다. 남북 분단 상황 등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대회를 성황리에 마무리했으며 1970년 대 이후 고도성장으로 격상된 지위를 전 세계에 뽐낼 수 있었다. 특히 88올림픽은 서울과 일본의 나고야가 경합을 벌인 끝에 52:27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개최국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2년 한국과 일본이 제 12회 월드컵 경기를 공동으로 개최하면서 전 세계의 시선은 다시 서울로 쏠리게 된다. 한국은 세계 강호인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물리치고 4강에 진출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고 ‘붉은악마’응원단의 열광적인 응원이 세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서울의 변화를 크게 보여주는 것은 청계천이다. 1760년에 원형이 완성된 청계천은 남촌과 북촌을 구분하는 경계선이자 서민들의 생활터전이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대륙 침략 수송로로 활용하기 위해 세종로사거리에서 무교동까지 청계천을 복개했고, 광복과 6·25 등의 혼란을 거치면서 청계천은 방치되었다. 쓰레기와 오물이 청계천에 쌓여가자 서울시는 복개를 결정하고 광교에서 신답철교까지 순차적인 복개를 진행했다. 그러나 서울이 더욱 발전하자 개발과 성장보다는 문화와 환경에 더 큰 가치를 두게 되었고 2003년 7월부터 복개된 도로를 걷어내고 청계천을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한 끝에 2005년 10월 1일 청계천이 정식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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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인구는 1950년 160만명에서 2008년 1,042만여 명으로 늘어났지만 세대당 인구는 5명에서 2.6명으로 줄었다. 광복 직후 서울에서 제일 높은 건물은 8층짜리 반도호텔이었지만 지금은 30층 이상의 고층 건물이 숲을 이루고, 광복 직후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는 한강대교가 유일 했지만 현재는 25개의 교량이 건설되어 있는 등 서울은 한국의 발전과 더불어 크게 달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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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img src="image/his19.jpg" alt="서울특별시"/></li>
<li><img src="image/his20.jpg" alt="서울특별시"/></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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